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호랑이는 배가 고파야 살생을 한다. 사자도 배가 고파야 살생을 한다. 이처럼 호랑이나 사자는 제 힘만 믿고 만나는 짐승마다 마구잡이로 해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들을 백수의 왕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표범이나 살쾡이가 한번 들면 한 마리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닭장의 모든 닭들이 죽임을 당한다. 목줄을 물어뜯어 발기고는 피 냄새를 맡으며 살기(殺氣)를 품어대는 살쾡이는 잔학하다.

살쾡이 같은 인간이 하나만 있어도 살인은 줄을 잇게 된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들이 살쾡이 같다는 기록을 수없이 지니고 있다. 옛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살생의 놀이들이 세계 도처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유태인 학살은 히틀러가 살쾡이 짓을 한 것이고 만주의 만보산에서의 학살은 왜병이 살쾡이 짓을 한 것이다.

어디 먼 외국에서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던가. 공자의 도를 앞세워 세상을 주물렀던 조선조에도 인간 살쾡이 짓들은 있었다. 역모를 하면 삼족을 멸한다는 형벌은 임금을 살쾡이처럼 만들 수 있었고 한강변의 절두산은 대원군에게 살쾡이 같은 살생의 버릇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근세에는 거창의 신흥면에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킨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모든 살생의 버릇들은 인간에게 숨이 있는 잔학한 살쾡이 근성일 것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이러한 속담은 종자가 좋으면 싹도 좋고 종자가 나쁘면 그 싹도 나쁘다는 말로 들릴 수가 있다. 본색은 못 속인다느니 본바탕이 어떻다느니 과거를 가지고 사람의 발목을 잡으려는 일들은 무수하게 많다. 아버지가 살인자라고 해서 그 자식마저 살인자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좌제라는 악법을 보면 마치 아비가 살인을 하면 그 자식도 따라서 살인자가 되어 버리는 꼴처럼 범법자의 피붙이를 묶어 버린다.

사상법의 가족들은 연좌제의 족쇄 탓으로 아버지를 밝힐 수 없거나 삼촌이나 형제를 밝힐 수 없는 세상을 보내야 하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는 심심찮게 드러난다. 요새는 그 연좌제란 것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요직에 등용될 때면 그러한 문제가 가시처럼 당사자들의 아픈 가슴을 찌르는 모양이다. 우리에게 숨어 있는 연좌제는 분단의 아픔이라고 자조하기도 한다.

친척 중에 누구 하나가 빨갱이가 되어있거나 자진 월북한 사람이 있으면 여러 가지의 불이익을 당해야했던 시절을 연좌제의 맛을 본 사람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연좌제는 분명 개 눈에는 개만 보인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이 사람을 믿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정당화해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 못 믿게 되면 결국 서로 의심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람을 제대로 돌봐줄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올바른 일을 하고 싶어도 과거를 따져서 못하게 한다면 세상은 한을 짓고 험악해지고 만다. 험악한 세상은 흉흉해지고 그러면 사람은 사나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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