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소중함

오늘은 우리 집 늦둥이의 생일날이다. 다른 해에는 그저 덤덤하게 날을 맞았지만, 올해만은 특별한 날을 맞게 해 주고 싶었다. 생각 끝에 아이를 공주처럼 챙겨 입히고 친구들을 대여섯명 초대했다. 초대받은 친구들은 단정히 옷을 챙겨 입고 정성스레 준비한 선물들을 안고 찾아왔다.

제 생일처럼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아이들의 모습이 대견해 보였다. 어찌 내 맘을 들켜 버린 것만 같았다.
아이와 친구들은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생일축하' 노래를 목청 높여 불렀다. 작은 음악회라도 열 듯 노랫소리에 젖고 모두 즐거운 표정이었다.

적적하기만 하던 집 안팎이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 노래 부르는 소리로 가득했다. 모두 싱싱하고 활달한 삶으로 충만해져 갔다. 어느새 일상에 찌든 내게까지 그런 기운이 옮겨지는가 싶었다. 아이들의 움직임, 말소리, 메시지 하나하나가 신의 선물이요, 생명력의 잔치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오늘따라 그 노래가사가 절절히 가슴에 메어왔다. 아이들의 노랫소리에 나도 어느새 생명의 기쁨에 젖어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늦둥이를 낳은 것은 내 나이 서른아홉이 저물어서였다. 그 날은 우리 부부에게 생애 최고의 선물이 주어진 날이었다. 하지만 그런 행운이 절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수많은 날 우리 부부의 인내와 공덕의 결과였다.

생명을 통해 가져보는 이 진한 기쁨은 지상에서 느낄 수 있는 최선의 감상일 것이다. 한없이 귀엽고 즐거운 것이 아이들의 재롱이다. 생명 앞에서는 모든 것을 잊는다. 세상 만물 중에서 그 어떤 대상이 이보다 더한 평화를 가져다주랴. 아이의 생일을 맞으며 생명의 소중함에 더욱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은 왜일까.

누구나 생명이 이어가는 앞길에는 고난도 있으리라. 엎어지고 깨어져 울던 어린시절처럼 아픔도 슬픔도 누구에게나 닥치리라. 그러나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익어 가는 게 인간이요, 수많은 실패를 거쳐 성공에 이르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그러니 우리는 제 능력만큼, 성숙의 무게만큼 책임을 져야 한다. 아픔도 삶의 한 과정이련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아픔이겠는가.

대통령의 죽음을 떠올린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운명이다. 화장해라",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이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남긴 말이다. 그랬다. 그 분의 삶은 여기까지였다.

산다는 것은 잡초를 뽑아내는 노역 같은 것인가 보다. 그래 '사람 사는 세상'을 이루어야 한다는 애도의 물결이 강을 이루었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국민들이 얼마나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있는지 추모 열기가 대신했다. 꽃잎이 다 떨어진 후에야 열매가 열리듯이 오늘의 우리 역경은 앞으로 축복의 통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 고단한 짐 내려놓으신 고인의 영정 앞에서 온 국민은 다짐했으리라. 이제부터는 무엇보다 대립과 갈등을 통합해 화해와 용서로 승화해 나아가야 한다고. 우리 사회가 분열을 극복하고 갈등을 해소해 온 국민의 마음을 한데 모은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지금은 모두가 부끄러워 할 때이다. 지금은 모두가 슬퍼할 때이다. 그러나 단지 그렇기만 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 날을 계기로 해 보다 밝고 고운 미래를 열기 위한 문고리로 삼는 슬기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 고인의 영면(永眠)을 기원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기만 하다.

▲ 김정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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