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애 수필가

 

[월요일 아침에] 김영애 수필가

가을을 뒤로한 채 여행을 떠났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뜨거운 여름에 몸과 마음을 푹 담그고 떠나온 곳에 대한 생각도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상념도 모두 잊고 시간을 보냈다.계절을 순서대로만 살다가 가을에서 여름으로 역행을 해 떠나는 묘미도 즐거움을 더했다. 하노이 공항에 도착을 하면서 두터운 외투를 벗어던지자 한 짐 삶의 무게를 내려놓듯이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여행을 꿈꾸고 떠나는가 보다.

도마뱀이 덕지덕지 붙어서 기어 다니는 하노이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오랜 내전으로 발전하지 못한 하노이 거리는 끈적끈적한 아열대 바람에 야자수 나무가 잎을 축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야하다 싶을 만큼 허리선까지 옆이 탁 트인 아오자이 전통의상을 입은 베트남 여인들이 야자 나뭇잎으로 만든 논이라는 모자를 쓰고 요염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자 그 옛날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의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여인이 생각났다. 전장 속에서 꽃피웠던 불같은 사랑이 이제는 시간 속에 역사 속에 조용히 묻힌 채 그 여인도 지금쯤 어디선가 조용히 늙어가고 있으리라. 병든 노장의 마음속에서 그녀 가슴속에 주홍글씨하나 새기고 살아갈 그녀의 흔적을 더듬는 거리에 어둠이 내린다.

밤이 되자 도심엔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대부분은 연인들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애정표현에 있어서는 어찌나 개방적이든지 오토바이를 탄 채로 뜨겁게 입맞춤을 하는 연인들의 모습이 절묘하기까지 했다. 신호등도 없이 서로 뒤섞이는 무질서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는 나라, 벌떼같이 윙윙거리며 질주하는 오토바이의 군무를 보며 그들만의 베트남 공화국을 승리로 이끈 저력이 느껴져 왔다.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부모님을 모시고 꼭 다시 오겠다'고 다짐하는 광고를 촬영했던 하롱베이로 향했다. 화선지위에 초록 물감을 풀어 놓고 그 위에 먹물을 꾹꾹 찍은 듯 삼천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 한 폭의 수묵 담채화가 펼쳐진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만큼 수려했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섬과 섬들 사이를 오가는 뱃머리에서 시름을 잊은 신선이 된다. 올망졸망 서로 이웃해 있으면서도 서로 손잡지 않으면 섬이다. 손 내밀면 잡힐듯하면서도 말없이 저마다의 위용만을 드러내놓고 있는 섬은 섬이다.

동행이 있어도 아랑곳없이 여정의 사색에만 빠져있는 내 마음도 저 바다위에 내려놓으면 하나의 섬이 될까! 문득 두고 온 것들이 그리워진다. 주섬주섬 가방을 싸면서 며칠만이라도 진정한 일탈을 꿈꾸었던 내 마음은 나 혼자만의 절대적인 행복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돌아오는 길에 하롱만의 일몰을 보았다. 주홍빛으로 타는 노을 젊은 군인의 향수를 달래주었던 아오자이 처녀의 사랑도 한때는 저렇게 곱고 아름다웠으리라. 해는 바다에 빠져 몸을 식히고 있는데 나그네 가슴은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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