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 서원대 교수

 

[내일을 열며] 이광표 서원대 교수

지난주 10월 8일, 한국조폐공사가 문화재청과 함께 ‘명성황후 책봉 금보(明成皇后冊封金寶)’를 내놓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명성황후 책봉이라…. 사연인즉 명성황후책봉금보를 본떠 기념메달 형식으로 제작해 판매하기로 하고 그 완성품을 공개한 것이었다.

이 금보 메달을 공개한 장소는 경복궁 건청궁(乾淸宮)이었다. 건청궁은 1873년 고종이 경복궁 내에 조성한 궁궐 속의 작은 궁궐이다.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간섭을 피하는 동시에 정치적 독립을 꾀하기 위해 고종은 일부러 경복궁의 북쪽 깊숙한 곳에 독립 건물을 지었다.

이 건청궁에 1887년 국내 최초로 전깃불이 들어왔다. 에디슨이 전구를 활용한 이후 불과 8년 만이었으니,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최첨단 전기문명이 무척 일찍 들어온 셈이다. 이런 점에서 건청궁은 한국 근대문명의 상징 공간이라 할 수 있다.

8년 뒤인 1895년 10월 8일 새벽, 왕비(명성황후)는 낭인을 앞세운 일본군에 의해 건청궁에서 무참히 시해 당했다. 일본군은 건청궁 옆 소나무 숲 녹산에서 왕비의 시신마저 불태웠다. 을미년에 일어난 변고라 해서 을미사변이라 부른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건청궁은 그 뒤 방치되다 1909년경 철거되었다. 초유의 참(慘)이었고 치욕의 연속이었다.

한 세기가 흐르고 2007년 건청궁은 복원되었다. 건청궁 바로 앞엔 아름다운 향원지 연못이 있다. 그 향원지를 배경으로 ‘한국의 전기 발상지’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건청궁 한켠엔 명성황후 순국 숭모비(明成皇后殉國崇慕碑)가 서 있다. 우리나라 전깃불의 발상지이자 명성황후의 시해장소. 그 엄청난 간극이 건청궁의 실제 역사였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리곤 무참히 숨을 거둔 부인을 명성황후로 추존했다. 2년만에 장례식도 치렀다. 당시 고종은 제후국이 아니라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명성황후의 어보(御寶)를 제작해 올렸다. 손잡이는 거북이 아니라 용 모양으로 디자인하고 재질도 금으로 했다. 중국과 동등한, 황제의 나라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번에 공개한 기념메달은 그 어보를 본떠 만든 것이다. 문화재청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명성황후 책봉 금보 메달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124년 전 명성황후의 최후를 생각하면 마음은 그리 편치가 않다. 문화재청은 “세계기록유산 조선 어보(御寶) 기념메달의 완결판”이라고 했지만, 명성황후 어보를 본떠 기념메달로 만든다는 것이 썩 적절한지,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한다.

경복궁 곳곳에 일제 침략의 상처가 남아 있지만, 건청궁은 경복궁에서 가장 슬픈 곳이다. 세상이 어수선해서 더 그런 것일까. 기념메달의 황금빛이 화려하다기보다는 화려해서 오히려 쓸쓸해 보인다. 기념메달도 좋지만 기념메달 그 이상의 성찰이 더 필요해 보인다. 지금의 우리는 100여 년 전과 얼마만큼 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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