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수요단상] 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남이야 어떻든 나만 편하면 된다는 사람은 예(禮)라는 것을 아예 떠난 놈이다. 이렇게 큰 소리를 친 한 할아범이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자리에 편안히 앉아 있는 젊은이의 귀에 들어가라고 아마도 그런 말을 외쳤던 모양이다. 그러자 쑥스러워진 젊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큰소리를 쳤던 할아범이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이 경우 두 사람은 다 예를 멀리한 꼴이 되고 말았다. 노인은 그것을 강요했으니 예 가 아니고 젊은이는 진심이 깃들지 않은 공손을 억지로 마지못해 베풀었으니 헛수고를 한 까닭이다. 예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고마운 마음으로 연결해 주는 줄이지 억지로 묶여지는 매듭이 아니다. 공손은 스스로 좋아서 자신을 낮추는 예이다.

현대인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멋있다고 구경한다. 폭력물의 영화를 즐겨보고 깡패들은 용맹을 피 흘리기로 여기고 의리라고 셈한다. 힘없는 자를 울려서 등을 치고 약점이 있는 자를 찾아서 발목을 잡아 넘어뜨린다. 그들의 손에 들린 칼이나 총은 예를 떠난 만용일 뿐이다. 예(禮)는 나보다 남을 존중하는 행위이다. 폭력물의 주인공이나 칼을 든 깡패들의 용맹은 용기가 아니다. 힘이 미쳐 버린 난동일 뿐이다.

난(亂)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힘으로 모든 것을 밟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예(禮)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난(亂)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강철은 강해서 부러지고 모가 난 돌은 정을 맞게 마련이다. 곧기만 하다고 정직한 것은 아니다. 촌지를 받지 않는 정직한 교사가 있었다. 고3 담임을 맡으면 철따라 쏠쏠하게 학부형들이 봉투를 가져다준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그 교사는 정말로 촌지를 받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앞세워 촌지를 밝히는 다른 옆 동료들을 내놓고 능멸하는 입버릇을 어디서나 부렸다.

졸업식 날 한 어머니가 그 교사를 찾아와 자식이 졸업하게 되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참기름 한 병을 선물로 들고 왔었다. 그 교사는 정색을 하고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 꼴을 본 옆의 다른 교사가 대뜸 댁의 아들 담임은 이분이 아니고 자기라고 알린 다음 참기름을 들고 안절부절 하는 어머니께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그 교사께 참기름을 건네주고 부리나케 나갔다. 참기름 병을 든 교사는 뚜껑을 열고 옆에 꼿꼿이 앉아있는 강직한 교사의 머리통에다 부어 버렸다. 그리고 졸업식 날 교무실에선 난투극이 벌어졌고 교무실 안은 참기름 냄새로 진동했다.

예를 떠난 정직은 이처럼 강박한 뒤탈을 낸다. 물이 맑아도 고기가 못살고 탁해도 살지 못한다. 정은 밥인 것이다. 그 밥을 버리는 것을 강박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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