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 등을 꼬아 틀에 맞춰 엮어 제작

▲ 김득신 '여름날의 짚신 삼기'.

신발은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몸의 일부처럼 착용하고 다니는 것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지금과 같이 구두나 운동화가 보편화되기 전에는 고무신을 많이 신고 다녔는데, 이는 우리 선조들이 처음부터 신고 다니던 신발이 아니고 근래에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고유의 신발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과거 선조들이 이용했던 우리 신발은 가죽 신발, 짚신, 나막신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죽신은 양반들이 주로 이용하였고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신고 다닌 신은 짚신이었다.

우리나라 짚신의 역사는 삼국초기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송나라 마단림이 지은 '문헌통고'의 마한의 풍속 내용을 보면, '신발은 초리(草履)를 신는다'고 했는데, 이 초리가 곧 짚신이다.

근래에 이러한 내용을 뒷받침하는 백제의 짚신이 부여 궁남지유적과 관북리 백제유적 등에서 64점에 이르는 '백제짚신'이 출토 되었다. 특이한 것은 현재 사용 되고 있는 볏짚이 아닌 강변에서 잘 자라는 식물인 부들로 밝혀졌다.

고려시대의 짚신에 관한 기록으로는 송나라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을 들 수 있는데, 초구(草)란 항목에서 "초구(짚신)의 형태는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모양이 이상하지만, 온 나라의 남녀노소가 다 신는다"고 하고 있으니, 짚신은 역시 고려시대의 대 다수의 국민이 신는 보편적인 신발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전의 짚신을 신는 전통과 짚신 삶는 기술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이다.

짚신은 일명 미투리·초혜(草鞋)·비구(扉履)·망리(芒履)라고도 하는데, 재료로는 짚으로 엮어서 만들고 있으나 삼이나 삼으로 꼰 노끈도 사용하였고, 왕골이나 부들로도 만들었다.

짚신을 만들기 위해서는 짚신을 만들 수 있는 틀을 사용하였다. 신틀은 여러 개의 구멍이 뚫린 두툼한 각목에 여러 개의 구멍이 난 판자를 끼운다. 그런 후에 새끼 한끝을 한쪽 기둥에 걸고, 다른 한끝을 허리에 감아 신뻔장으로 당겨가며 신을 삼기도 하고 여러 개의 기둥이 박힌 두툼한 각목에 두 개의 나무를 끼워 바닥을 삼은 뒤 짚신을 삼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짚신은 요즘 가죽신에 비하여 오래 신을 수 없고 비오는 날 물이 스며드는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짚으로 엮어 만들었기 때문에 공기가 잘 통하여 발에 생길 수 있는 무좀과 같은 질병이 생기지 않으며, 짚 특유의 탄력성 때문에 발의 피로감을 덜어 주는 장점이있다.

▲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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