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순 수필가

 

[기고] 임정순 수필가

잠잠하던 병이 오늘 또 도졌다. 내 생각으론 대학병원이나 더 큰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가도 못 고치는 병이다. 아니면 오지랖 병이라도 되는 건지. 오지랖 넓다는 말은 주제넘게 간섭하거나 비아냥거릴 때 쓰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넓다는 표현도 있다. 누가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주고 싶은 병 은 대체 무슨 병일까.

달력에 적어 놓고 기다리던 밤 줍는 날이다. 엊저녁부터 남편에게 다짐을 했지만 막상 아침이 되고 보니 일어나기 싫은 남편도 내심 오늘 아니면 닦달할 마누라 성화를 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기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선점을 해야 한다. 주황색 옷을 입고 앞서 걸어가는 사람은 빈손이다. 다행히 밤 주우러가는 폼은 아니다. 벌초하러 갔을 때 보다 그동안 사람들이 몇 번 다녀간 흔적에 산에 오르기는 수월했다.

큰 거만 주우라고 남편은 또 당부한다. 그러마 했지만 작은 것부터 눈에 띄니 우선은 줍기 시작했다. 간밤에 떨어진 밤들이 여기저기 많기도 하다. 오른 손으로 주워 왼손에 가득하면 보따리에 담았다. 큰 것들도 심심찮게 있으니 금방 무거워졌다. 남편은 보이지 않는다. 분명 큰 것만 주울 테니 작은 거라도 많이만 줍자. 그런데 분명 지나간 자리인데 누가 알밤들을 뿌려 놨는지 아님 사람들 발자국이 그리워 살포시 떨어졌는지 신바람에 정신없이 얼마를 줍다가 허리를 펴고 남편을 부르니 저 쪽 산이 대답한다. 굵은 밤들이 그득한 것을 보더니 약간 놀랜다. 들어보니 내가 더 많기는 하다. 나물을 뜯으러 가도 제일 많이 뜯는다는 말에 은근히 힘을 준다.

세 종류로 분류해보니 한말은 더 될 것 같다. 우선 물을 팔팔 끓여 잠시 동안 담그면 밤 속에 든 벌레들이 죽어 오래 보관해도 끄떡없다. 큰 것은 손자먹이라고 한 봉. 또 한 봉은 벼슬한 딸네식구. 거저 얻은 가을 선물을 누굴 주면 좋아할까. 슬금슬금 이 사람 저 사람들이 다가온다.

몇 년 전 전원주택에 살 때 일이다. 마당에서 수확한 검정콩 세말을 밤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특등품을 만들어 자루에 담아 놓고는, 먼 길 오는 사람마다 콩 한 되와 늙은 호박 한 개에 얼굴보다 큰 해바라기를 손에 들려 보냈다. 푹푹 퍼내다보니 점점 가벼워져 아들 방에 감춰 놓았다. 상대방이 부담스럽게 생각할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빈손으로 못 보내는 것이 병이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해봤다.

또 한 번은 겨울이면 콩나물 길러먹는 것을 좋아해 콩나물 콩을 한말 사서 길러먹는 기쁨을 나눠 보고자 모임 때 가지고 나갔다. 그날따라 주고 싶은 사람이 나오질 않아 함께 걸어오던 사람에게 주었더니 만날 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몇 번 들었다. 아침운동에 만난 사람도 옥상까지 데리고 와 근대며 상추를 한 움큼씩 뽑아주면 무공해라고 좋아한다. 줘도 내일이면 그 자리에 밤새 채워지니 신기하다.

이병은 분명 유전이다. 친정어머니가 그랬다. 그 당시는 너무 싫어서 밉기까지 했다. 어쩌면 저렇게 실속 없이 퍼 주기만 하는지 뒀다가 자식들 먹이면 될 것을, 내 주위에도 주고 싶어 안달 난 친구가 있다. 택시를 타고 모임에 가다가 기사가 형편이 어려워 옷도 못 사 입는다는 말을 듣고 차를 돌려 집으로 가서 옷을 세 봉지나 싸 주느라 모임에 늦었다는 사람도 분명 고칠 수 없는 깊은 병임에는 틀림이 없다. 남편 친구 역시 마누라 허락도 없이 저장해둔 물고추 간 것 한 봉지와 뽕잎 말린 것을 주기도 하고, 옆집에 살던 남편의 동갑내기 여친은 봄에 귀한 오가피 순을 꽤 여러 번 줘서 맛있게 먹어 놓고는 정작 인사도 못했다.

제일 작은 것은 눈 오는 날 TV보면서 쪄먹어 볼 양 냉동실에 넣었다. 강원도 찰옥수수도 들어 있고 냉동실이 비좁다. 구석구석 욕심도 들어 있다. 나이 들면 병도 굴려가면서 살라 했으니 병 하나쯤 더 추가한들 좋은 약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니 괜찮다.

남편을 살살 구슬려 밤 주우러 또 가면 된다. 밤이 면역력에 좋고 특히 신장에 탁월하다니 이 보다 더 강력한 말이 또 있을까. 창피하게 어떻게 설명하고 약을 사오느냐고 몇 번 말했으니 한밤중에 약 사러 가는 것 보다 백배 낫다. 아직 당첨되지 않은 세 봉지의 주인공은 누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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