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대장이 자리를 차지하기도 전 이미 동네 꼬마들이 다 모였다. 소가 있는 우리부터 먹이를 주어야 하는데 염소 먼저 챙기게 된다. 소는 눈을 껌벅이면서 양반처럼 천천히 움직이지만 염소는 건초를 실은 외발 리어커가 보이지도 않는데 우당탕거리며 구유 앞으로 모여든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사람보다 동물이 더 많았었다. 고양이, 강아지, 토끼, 닭, 돼지 그리고 소까지 돌보며 가족처럼 살았다. 그중 토실토실한 강아지가 예뻐서 매일 밤 꼭 안고 잠들었다. 그런 내 모습이 부러웠는지 동생은 고양이를 안고 잤다. 할머니는 강아지를 방에서 재운다고 걱정 하셨고 엄마도 타일렀지만 고집을 꺾지 못했다. 아침마다 닭장에 들어가서 따뜻한 계란을 들고 나왔다. 안마당에서 먹이를 주면 지대가 낮은 바깥마당에 있는 구유에 떨어져 돼지들은 꿀꿀거리며 모여 들었다. 소는 힘든 농사일도 했지만 일 년에 한배씩 송아지를 낳아 제일 귀한 대접을 받았다.

큰댁에는 염소를 상수리나무 숲에 방목하여 키웠다. 시집간 큰언니와 공부하러 도시로 나간 오빠들 대신에 언제나 집을 지키던 향자언니가 적적하다고 할머니가 가끔 나를 보냈었다. 하루만 자고 오겠다고 약속하지만 막상 가면 언니가 잘 해주기도 하고 아기염소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며칠씩 묵었었다. 땀을 뻘뻘 흘린 데다 넘어져 흙투성이가 된 나를 우물가에서 씻겨주던 언니는 얼굴이 하얗고 공주처럼 예뻤다. 맛있는 부침개도 금방 지져주고 옷이 더러워졌다면서 재봉틀 앞에 앉으면 금새 원피스를 만들어 입혀주었다. 그래도 밤이 되면 어린 마음에 집으로 가겠다고 어깃장을 놓고 아침이 되면 밥도 안 먹고 염소우리로 향했다.

스물이 되었을 때부터 바람이 조금만 거칠게 불면 목덜미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풀밭에 앉아 있어도 그렇고 복숭아처럼 털이 있는 과일을 만지면 영락없이 부풀었다. 큰아이가 동물을 워낙 좋아해서 별스런 애완동물과 동거했지만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강아지와 고양이처럼 털이 있는 친구들은 우리 집에 얼씬도 못했다.

얼마 전부터 용기를 낼 일이 생겼다. 형부의 동물농장에 한 번씩 들러 언니를 도와 건초와 채소찌꺼기를 먹여야 한다. 형부가 건강상의 이유로 가끔 농장을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언니가 옆에 있으니 무서울 게 없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농장을 지키는 개들이 짖기만 해도 오금이 저렸었다. 그런데 몇 번 먹이를 주었더니 그들이 먼저 꼬리를 살랑거리며 아는 체를 한다.

염소의 울음소리는 ‘음매’가 아닌 뱃고동이나 기차의 기적처럼 들린다. 귀엽고 예쁘게만 생각되었던 염소의 참을성은 또 얼마나 없는지 양보 할 줄도 차례를 지킬 줄도 모른다. 자신의 안위밖에 모르는 요즘 사람들과 닮았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들 나름의 규칙이 있다. 대장이 먼저 먹기 시작하면 서열에 따라 먹는다. 대장은 뒤로 물러나 새끼들이 제대로 먹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둘러본다. 양반가의 자제 같은 소와 평범한 사람들의 삶 같은 염소가 유년의 고샅을 추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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