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자 수필가

 

[충청칼럼] 한옥자 수필가

특근한다며 아들은 일터로 떠났다. 이 추운 날씨에 특근이라니. 자세한 사정을 알 길 없는 어미는 현관문이 열리길 기다리느라 밤새 뜬눈으로 기다렸다.도대체 밤중에 해야 하는 근무 내용이 무엇인지 아무리 추측해봐도 알 길이 없었다. 밤을 하얗게 밝히고 출근 준비를 하는데 아들이 돌아왔다. 새벽 6시였다. “무사히 돌아와서 고맙다.” 저절로 기도가 흘러나왔다.

지난주는 어머니들의 피눈물을 자주 보아야만 했다. 홀로 근무하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진 비정규직 청년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가 아들의 1주기 추모제에서 편지를 낭독할 때, 교통사고로 숨진 자식들의 이름을 걸고 만든 어린이 생명 안전법이 국회의 파행 때문에 절벽에 부딪혔을 때, 어머니들은 펑펑 울었다. 눈물이 아니라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였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었다.

본회의를 연다, 못 연다, 대치하다가 겨우 민식이, 하준이법이 통과되고 나서 국회를 찾은 고 김민식 군의 어머니는 남편이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내내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했다. 악성 댓글에 너무나 시달려 사람들이 무섭고 두려워서라고 남편이 대신 말했다.

MBC 방송의 ‘2019 국민과의 대화, 국민이 묻는다’에서 그녀는 자신의 바람을 울음 섞인 말로 간절하게 구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서 있는 지금의 그녀는 그때와 달랐다. 기자에게 에워 쌓여 갖은 질문 세례를 받아도 침묵할 뿐, 맥 풀린 동공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한이 쌓여 차마 쓰러지지도 못하는가.

자식들이 직장인이 된 후, 수시로 기도가 나온다. 행여 나도 김용균의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닌가, 늘 불안하다.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가 말했다고 한다.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아들의 동료들에게, “여기에서 나가라. 너희들 부모가 알면 여기서 일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라고.

교통사고 피해자 아이들의 어머니들도 국회 본회의 무산 후 오열했다. “아이들 이름을 협상 카드로 내세운 것은 모욕”이라고. 이쯤 되면 말이 아니라 비명이다.

묘지만 봐도 덜덜 떨던 유년시절이 있다. 특히 봉분이 나지막한 무덤을 만나면 더 그랬다. 인간의 한 생이 생사고락의 고갯길을 넘나드는 길이라는 것을 알 턱이 없던 어린아이는 죽음이 무서웠다. 동산에서 잘 뛰어놀다가도 무덤이 보이면 누가 뒷덜미를 채는 것 같아 걸음아 나 살려라, 집으로 뛰곤 했다.

매장문화가 주류를 이루던 때라 동산마다 작은 무덤이 흔했다. 마을 어느 집에 금줄이 걸리면 이웃들은 삼칠일 전에는 출입하지 않았다. 백일이 되면 하얀 백설기 떡을 100명의 이웃에게 돌리며 자식의 무병장수를 바랐다. 떡을 얻어먹은 이웃들도 백일 떡은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며 아무리 형편이 어렵더라도 굵은 실타래를 듬뿍 담아 아이의 무병장수를 축원했다.

우리 민족의 정서는 그랬다. 이웃의 아픔이 곧 내 아픔이고 자식 가진 부모는 남의 자식을 함부로 흉보지 않았다. 식구가 늘고 줄어드는 것을 한 입 줄었다. 한 입 늘었다고 말할 정도로 팍팍한 삶일지라도 이웃 간에 같이 울고 같이 웃으며 먼 사촌보다 이웃사촌이 낫다고 했던 국민이다.

어머니들의 피눈물에 악성 댓글을 섞지 마라. 당신도 자식을 둔 어버이라면. 그들은 누구나 겪게 될 가능성을 최대한 막고자 애쓰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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