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4장 소슬바람으로 바느질을 하며

▲ <삽화=류상영>

가을에 추수를 했다고는 하지만 모산 사람들 두지에 쌀 한가마니 분량을 담아둔 집이 드물었다. 대부분이 소작농이라서 수확한 벼의 절반 이상은 지주인 후지모토에게 도조로 받치고, 남은 벼마저 공짜나 다름없는 정부 고시가인 헐값에 공출미로 받친 뒤라서 제사를 지낼 쌀과 신주단지에 모셔둔 쌀이 전부인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저기 다 쌀이란 말이지?"

"쌀이 아니믄 모래란 말여?"

"사내끼로 가마니를 꽁꽁 묶은 걸 보믄 틀림읎는 쌀이구먼. 저 쌀을 송림사에 받친다는 거여?"

모산사람들은 이복만 집 머슴의 입을 통해서 송림사에 시주를 하러 가는 길이라는 점을 먼저 알고 있었다.

그 소문은 물결처럼 삽시간에 모산 마을을 흔들어 놓았다. 사람들은 조선시대에 원님 행차를 구경하는 것처럼 둥구나무 거리로 모여 들어서 수근 거렸다.

옥천댁은 세금을 못 내거나 공출미가 부족해서 일인 순경들에게 끌려가는 동네사람들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지 죄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들을 낳기 위해서 다른 집에서는 일 년 동안 먹을 양식을 공양미로 바치기 위해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니까 얼굴이 화끈 거려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송림사 주지스님이 뉘여?"

"공혜 스님이잖여."

"공혜 스님 입이 찢어지겄구먼. 쌀 다섯가마니믄 내년 여름까지 보리쌀귀경할 필요가 읎겠구먼."

"이럴 줄 알았으믄 진작에 머리깎고 절로 기어들어가는 긴데."

"아무나 절에 들어가는 줄 아남? 태어날 때부터 쌀밥 먹는 놈 팔자 정해져 있듯이, 스님도 팔자가 따라줘야 하는 거여."

동네 사람들은 해룡네 집 앞에서 모두 걸음을 멈추고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옥천댁은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발이 달려서 계속 뒤를 따라 오는 것 같아서 쫓기듯 걸었다.

"부처님께 열심히 기도를 하시믄 좋은 결과가 나올게유. 자고로 지성이믄 감천이라고 했응께."

송림사의 주지 공혜 스님은 반드시 아들을 낳는다는 확답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보은댁은 그 말만으로도 옥천댁의 뱃속에 들어 있는 태아가 아들일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은진가도 말했지만 지지바가 입던 배냇옷을 갖고 있으믄 또 지지바를 난다고 하드라. 넌 그런 말을 못 들어 봉겨?"

출산을 석 달 앞둔 유 월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마당에 있는 석류나무가 빨간색의 꽃을 피우고 있던 시기였을 것이다. 옥천댁은 보은댁이 넌지시 던지는 말에 가까운 날 학산 포목점에 가서 무명을 한 필 끊어오겠노라고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옥천댁은 이튿날 아랫사람을 보내지 않고 직접 학산에 있는 포목점으로 갔다.

처음 배냇저고리를 입을 아이의 살은 아직 세상의 때가 묻어 있지 않다. 사람의 살이라기보다는 신의 살결처럼 조심스럽게 대하여야 하는 아이의 맨살이다. 그 살에 직접 접촉을 하는 옷인 만큼 아무 천이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 깨끗한 천이어야 함은 물론이고 부드러워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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