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때 아닌 비가 내린다. 소한(小寒)에 여름비 오듯 연일 내리는 비는 예사로 보던 풍경이 아니다. ‘대한이 소한네 집에 놀러왔다가 얼어 죽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계절감을 느낄 수 없는 요즈음 날씨도 이상하지만 빗속에 꽃다발을 안고 학교를 향하는 엄마들의 모습이 생소해 보인다. 1월초인데 졸업식에 가는 중이란다. 흰 눈 속에 이루어지던 졸업식에 비라니 분명 이상기온이다. 학사일정과 졸업 시기가 달라져가고 있다. 대부분의 학교가 1월 초부터 중순경에 종업식과 졸업식을 하고, 봄 방학을 없앴다.

찬·반 양론이 있다. 2월에 이루어지던 수업은 별 의미 없이 형식상이라는 것과 두 달여 방학기간은 자기계발에 유용하다는 이론이다. 또 한편으로는 일찍 졸업하면 무적 상태의 기간이 길어져 일탈 학생의 관리에 어려움이 있고 안전사고에 문제가 있다는 것, 그리고 맞벌이 가정의 경우 사교육비용의 부담을 우려하는 측면이다. 어느 쪽이든 장단점은 있으나 대체로 1월 졸업으로 흐르는 추세인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학교 선생님들 입장에서는 새 학년 준비에 여유로울 것이다.

졸업식 분위기 역시 많이 달라졌다. 밝고 경쾌하다. 하지만 경박하게 흐르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졸업은 새로운 도약의 전환점이 아닌가. 옛날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던 시절, 눈물 바람 하던 졸업식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진지하고 경건하게 교육의 의미를 새겨보면 어떨까 싶다.

진천에서 유서 깊은 상산초등학교의 경우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박탈될 무렵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이상직 선생에 의해 세워졌다. 나라가 쓰러질 위기에서도 교육이 그만큼 절실했던 것이리라. 이상직 선생은 중국 용정에 항일 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세운 이상설 선생의 사촌 동생이다. 이월초등학교 역시 독립운동가 신팔균 선생이 사비로 세운 ‘보명학교’에서 비롯되었다.

동천 신팔균 선생은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하여 1907년 근위보병대 정위(현재 대위)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군인 장교였다. 고종황제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등을 특사로 파견한 것을 계기로 일본은 고종의 퇴위와 함께 황실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신팔균 장군은 이월면 논실마을로 낙향하여 학교를 세우고 항일 비밀 결사대인 대동청년단을 조직, 의병활동을 하게 된다.

그 후 장군은 간도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서 군대를 체계적으로 훈련시켜 3,500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으며 청산리, 봉오동 전투에 참가, 독립운동에 몸 바쳤다. 지청천, 김경천과 함께 독립군 인재 三天으로 불리던 지휘관이다.

현재 이월 논실 마을에 그의 조부인 신잡 선생의 고택과 영정을 모신 노은영당이 있다. 신잡 선생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군사 전략가였고, 낙향하여 ‘백원서원’을 세워 후학 양성에 힘썼다. 임진왜란 시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장군은 신팔균 장군의 작은할아버지이고, 아버지 신석희 선생 역시 한성부 판윤을 역임했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어려운 시기, 먹고 살기에 급급했어도 우리 선조들은 교육을 중시하고 힘을 썼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학교를 세웠다. 교육이 곧 바른 미래임을 아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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