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바람이 살랑댄다. 땅은 얼지 않은 듯 포실하다. 금새 봄의 기운이 올라올 듯 하다. 갈대가 알몸으로 서서 눈부신 햇살을 받고 발밑으로 흐르는 물은 반짝인다. 평화로운 미호천의 둑으로 올라서면 공사현장의 하늘까지 닿을 듯한 기중기가 오수에 빠져 있다.

이십 여 년 간 일터는 강내면에 위치해 있다.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청주의 자랑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이 있고 반대편인 왼쪽은 조치원 방향이다. 살림집은 강내와 청주에 머물다가 몇 해 전 우연찮게 세종시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이사 전까지 웬만해서는 미호천을 건널 기회가 없었다. 어찌하다가 맛 집을 찾거나 조치원역으로 아이들을 마중 나갈 때를 감안해도 기억으로는 그리 많지 않다.

출근길은 고가도로를 지나 미호천이 보이면 무사히 왔다는 안도감이 먼저 든다. 가끔 둑길을 따라 자장면을 먹으러 가고 화초 가게를 들르기도 한다. 소박한 풍광은 옥산면으로 이어지고 청주역으로 연결되어 있다. 반대로 되돌아 길을 따라가면 조천에 다 달을 수 있다. 연둣빛의 새싹들로 봄을 알리면 마음이 나부끼기 시작한다. 먼 길을 나서기 어려운 매인 몸은 아침저녁으로 흐드러지게 핀 벚꽃의 향기에 취한다. 그러니 봄의 길엔 어릴 적 동무가 찾아와도 그리로 안내하게 된다. 형편이 비슷한 동료와 드라이브를 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 할 때도 어김없이 찾는 길이다. 여름의 낭만은 뜨거운 태양아래서 푸르기만 할 것 같지만 보슬비라도 내리는 날의 물안개는 가슴이 저릿하다. 가을의 단풍은 먼 길 돌아가지 말고 어서 그늘에 앉으라 한다.

퇴근길은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넌다. 더구나 요즘 들어 도로확장공사로 진입로까지 어수선하게 중앙선이 그어져 있다. 서툰 운전자는 곡예운전을 할 수밖에 없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삼거리에 점방을 펼쳐놓은 김氏 영감은 짐자전거에 물건을 싣고 새벽마다 미호와 조치원을 오갔단다. 말이 쉽지 비포장도로 오 십리 길을 자전거로 달리다 보면 제 아무리 단단히 갈무리를 해도 헐거워져 끌고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등짐을 지고 오갔으며 돌다리를 건너야 했다. 사람들의 사정은 볼 것 없이 비라도 내리면 며칠이고 기다리는 게 일이었다. 그러니 자전거로 오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가족을 위해 희생한 우리 내 아버지의 처절한 삶이었다.

그 시절 미호천엔 동네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늦도록 천렵을 했었다. 노인들의 텃밭으로 소일거리가 되고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 이의 생업이 되기도 했다. 그런 미호천은 미호교를 가운데 두고 한쪽엔 기찻길이 있고 다른 쪽은 더 크고 견고한 다리가 세워지고 있다. 미호천 가에서 야무지게 살아 낸 사람들의 추억은 아스라이 멀어져 간다. 작은 욕심을 가져 본다. 천변에 산책길을 만들어도 좋고 농구장이나 테니스장을 열어 놓으면 어떨까 싶다. 미호교가 다리로써 제 몫을 다하였다면 강내와 오송의 옛 풍물들로 채우면 아쉬움이 덜하리라.

봄이 온다. 몇 차례 꽃샘추위가 매몰차게 지나가고 세상이 변해도 미호천은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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