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4장 소슬바람으로 바느질을 하며

▲ <삽화=류상영>

보은댁은 들례의 신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들례가 일본인과 사이에 아들을 하나 두었다는 것도 노름꾼 남자와 한동안 동거를 했다는 점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노동력이 필요할 때는 언제나 품삯을 주고 놉을 얻듯, 들례가 나이도 어리니까 자궁도 건강할 것이라는 점뿐이다. 그 이면에는 들례를 돌보아 줄 사람들이 없으니까 손자만 얻고 나서 언제든 쉽게 내쳐 버릴 수 있다는 점도 작용을 했다.

"아들만 낳으믄 먹고살만한 재산을 맨들어 준다는 말이 틀림없쥬?"

들례도 정절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나까의 아들이면서 손기문이라는 한국이름을 가진 아들을 서울의 고아원에 맡긴다는 조건으로 보은댁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 들였다.

이동하는 약간은 모자라게 보이는 듯한 들례의 겉모습만 보고 부담 없이 합방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불속에서 만져보고 느껴 본 들례는 단순한 씨받이가 아니었다. 가슴으로 찰거머리처럼 안겨들 때는 온 세상이 정지해 버리는 전율에 젖었고,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것처럼 흥분해서 몸부림을 칠 때는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뻤다.

이동하는 이병호가 면장직을 퇴직한 후에 학산면사무소에 정식 직원이 됐다. 학산면사무소는 10리 길이다. 모산에서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면 삼십 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다.

그릿고개만 오르면 그 다음부터 학산까지는 내리막이라 힘이 들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이동하는 들례의 집에서 기거를 했다.

이동하가 들례 집에서 기거를 시작한지 마침내 반년이 지났다. 그동안 초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동하는 공무원 신분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제 돈을 들여가며 노골적으로 선거 운동을 했다. 자전거를 타고 면사무소 동네 곳곳을 얼마나 쑤시고 다녔는지 자유당 한산면 책임자는 문기출이 아니고, 이동하라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 공을 인정받아서 선거가 끝난 후에 몇 계단을 뛰어 넘어서 부면장이 됐다.

"들례 몸에 이상이 있는 거시 아닌지 모르겄네유."

이동하가 집에 들린 날이다. 이미 들례의 몸에 이동하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옥천댁이 이동하에게 넌지시 물었다.

"대전에 있는 병원에서 검사를 해 봤어. 이상이 읎다고 하드만. 쫌만 지달려 봐. 아들이 생기겄지."

"그릏다고 마냥 들례한티 소식이 오길 지딜라고만 있을 수는 읎는 노릇이잖유."

옥천댁은 아들을 못 낳았을 뿐이지 육체는 여름날 이슬에 젖은 들꽃처럼 젊고 싱싱했다. 반년 동안이나 빈 방을 지키고 있기에는 너무 젊기도 했다. 하지만 대놓고 이동하에게 말 할 수가 없어서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고로 먼 일을 하드라도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읎는 벱여. 다 된 밥에 코 흘릴 생각 읎으믄 몸가짐을 조신하게 하는 거시 좋을거여. 나도 할 일 읎이 들례가 좋아서 마냥 학산에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 줬으믄 좋겄고."

이동하는 옥천댁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들례에 비교해서 옥천댁은 현이 늘어진 가야금이고 소리가 나지 않는 장구였다. 이동하는 들례를 만나기전에는 소리가 나지 않는 악기라도 만족을 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묵음은 실어서 옥천댁의 손끝도 만져보지 않고 냉정하게 일어섰다.

옥천댁은 상대가 근본도 모르는 들례라는 생각에 매정하게 일어서는 이동하의 바지자락을 잡지 못했다.

"오늘부터 니가 에미여. 누가 머래도 니 새낑게, 니 새끼라고 생각함서 키워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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