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천 입시학원장

[목요사색] 정우천 입시학원장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은 어쩌면 호모사피엔스의 본성에 대한 시험대 같기도 하다. 누군가는 코로나 19의 피해가 극심한 전쟁터 같은 질병의 한가운데로 몸을 던져 봉사하고, 누군가는 마스크 사재기를 하고 빼돌려 개인의 욕심을 채운다. 같은 재난을 맞이해도 인간은 이렇게 다르게 행동한다. 이기심과 이타심은 선천적인 속성일까. 만약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면 인류는 오랜 진화과정을 거치며 이기적인 사람으로만 구성된 세상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기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이 뒤섞여 구성돼 있고, 개인도 상황에 따라 어떤 때는 이기적이었던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는 이타적인 사람이 되기도 한다. 아마도 호모사피엔스의 진화과정에서 생존확률을 높이는데 어떤 경우는 이기심이 유리하고 어떤 경우에는 이타적인 마음이 유리해 그렇게 됐을 것이다.

“집단 내에서는 이기적인 개인이 이타적인 개인을 이기지만, 이타주의자들의 집단은 이기적인 개인들의 집단을 이긴다. 개체선택은 죄악을 부추겼지만, 집단 선택은 미덕을 부추겼다고 할 수 있다.”라고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말했다. 이를테면 개인 간에는 이기적인 사람이 이타적인 사람보다 우위에 설 가능성이 높지만, 집단 간의 투쟁에서는 이타적인, 즉 조직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많은 쪽이 이긴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기적인 개인으로 살아남은 경우와 이타적인 개인으로 구성된 조직에서 생존한 사람이 균형을 이뤄 사회는 이기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이 균형을 이루었을 것이다.

자신의 조직을 위해 헌신하는 이타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은 당연히 강한 조직이다. 그러나 그 조직에 대한 이타적 행위가 다른 조직에는 이기적인 행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타적 행위가 선(善)이 되는 적절한 조직의 규모를 윤리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직장, 사회, 국가를 넘어 인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이 밖에서 행하는 이기적 행동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이타심에 기인하는 경우도 많다. 거꾸로 국가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이타적인 헌신 및 희생은 다른 국가에는 재앙일 수도 있는 일이다. 히틀러가 지배한 독일에 충성을 다한 병사나, 군국주의 일본제국을 위해 가미카제 특공대로 목숨을 바친 헌신은 이웃 연합군에게는 재앙에 불과하다. 팬데믹의 공포 속에서 이웃 국가에 빗장을 걸어 닫는 통치자의 행위도 국가 이기주의겠지만 자국민에게는 사랑일 것이다.

국가든 어떤 조직이든 이타적 행위를 숭상하고 부추긴다. 그게 국가나 조직 전체를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타적 행위와 이기적 행위가 뒤엉켜 혼란스러운 코로나 19 상황은 또 다른 생각을 하게 한다. 헌신과 이타적 희생의 미덕으로 자신을 던지는 의료 전문가집단과 절제된 개인의 사연이 넘친다. 그러나 그 헌신 뒤에 무임승차하는 정치인 집단 또한 있지 않나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정치적 집단이야말로 당파적 이기심으로 그 조직에는 득이 되나 국가 전체에는 해가 될 수가 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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