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숙 수필가

[백목련] 육정숙 수필가

사방이 고요하다. 들려오는 소리는 오직 바람 소리 뿐! 비 온 뒤 불어오는 바람에서 초록향기가 난다. 맑고 깨끗한 초록바람이 혈관 속을 정갈하게 씻어 내리는 것만 같다. 늙어가는 세포가 회춘 할 것만 같은 싱그러움에 눈을 감고 그 향기를 음미해본다. 문명이 아무리 발달한다 한들 자연의 오묘함만 할까! 예나 지금이나 자연의 숨결은 언제나 옳다.

늘 오가던 길, 가까이 있었기에 무심함으로 멀리 했던 건 아닌지 싶어 비가 그친 오후에 토성을 찾았다. 사적 제415호인 청주시 정북동 토성은 미호천의 남쪽 평지에 자리한 금강유역 유일의 네모꼴 토성이다. 성벽의 축조방식이나 출토유물을 볼 때 삼국시대 초기인 3세기에 처음 만들어 진 곳으로 추정 되며 이후 후삼국 시대에도 활용 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둘레는 675m 1.6m~1.7m간격으로 성벽의 안팎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사이를 나무판자로 구분을 하여 흙과 진흙을 교대로 다져 쌓은 토성이다. 성곽이 본격적으로 축조되기 시작한 초기단계의 유적으로 보존상태가 좋고, 평지에 네모꼴로 쌓은 토성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으로 귀중한 자료로 평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특이하게 성의 바깥쪽엔 25m나 되는 너비로 파여진 골이 토성 바깥쪽 둘레를 싸고 있다. 이를 해자라고 한다. 해자(垓字)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파놓은 못이다. 성벽 바깥 둘레를 살펴보면 지금도 일부분엔 물이 채워져 출렁이고 있다.

성벽 둘레를 파고 물을 채워 적을 방어하며 살아가던 그들이 어디선가 웅성거리며 나타 날것만 같아 주위를 추스르는데, 토성을 휘돌아 나오는 바람소리가 마치 휘파람 소리처럼 들려 순간, 온 몸으로 소름이 돋았다.

어느새 야트막한 토성으로 노을빛이 스며든다. 시대를 거슬러 유추해보던 옛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마구 쏟아 놓기라도 할 듯, 붉은 노을이 해자 깊숙이 파고들었다. 세월 속으로 사람은 가고 시대도 따라 변하니 형상은 사라지고 옛사람의 시간들은 영겁의 시간 속에 묻혀있다는 생각이 드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산다는 일에 있어 그들이나 문명이 고도로 발달 된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나 먹고 사는 일에 근본은 같을 것이 아닌가!

문명이 고도로 발달 될수록 방어력 또한 고도로 지능적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도 국가안보는 물론 경제적인 면에서도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긴장을 늦추지 못한 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뿐일까! 지금 전 세계가 비상시국이다. 생명을 담보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적! 코로나 바이러스와 힘겹게 싸우고 있는 중이다.

해자(垓字)는 오래 전 옛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명이 발달 할수록 지능적인 해자가 더욱 필요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착잡해졌다.

불편하고 힘들지만 물을 채워 넣은 해자로 적의 침입을 막고자 했던 시대가 막연하게 그리운 건 단편적인 생각일 뿐인가! 복잡한 마음에 울적함이 스민다. 붉게 내리는 노을이 나지막한 토성과 그리 멋지지 않은 소나무와 보통 사람들을 품었다. 정북동 토성은 노을이 내리는 시간에 영묘한 기운을 드러낸다. 가장 신비스런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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