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자 1만1820명·돌 18만7600개 등 이용 축조

수원화성(사진)은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돌로 쌓은 둘레 5520m의 성으로 조선 후기에 축조하였다.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축성된 평산성으로, 창룡문, 화서문, 팔달문, 장안문의 사대문을 비롯하여 각종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

본래 수원의 읍 치소는 화성군 태안면 송산리에 있었으나, 1789년(정조 13) 정조가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園)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읍 치소와 주민들은 현재의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안전을 위해 성 쌓는 것이 논의되자 정조는 수원부를 화성(華城)이라 바꾸고 성 쌓기를 시작하여 1796년 9월에 완공을 하게 되었다.

수원성곽의 축조방법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던 전통적인 축성 경험을 바탕으로 유형원과 정약용 등의 과학지식을 활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기의 발달과 중국성제의 장점을 종합하고 있다.

성벽은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돌과 모래로 다진 뒤 그 위에 배흘림을 준 규형(圭形)의 벽을 쌓았다. 성곽주위의 호(壕)는 산 부분에서는 두르지 않고 평지부분만 돌렸고 성의 서남쪽에 해당하는 화약루와 서남암문 사이의 작은 계곡에서 흐르는 계곡물은 자연호를 이루었다.

준공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따르면, 이 성을 쌓는데 들어간 인력과 재정은 막대한 것으로 동원된 노동력만 보더라도 석수 642명, 목수 335명, 미장이 295명을 비롯하여 기술자가 총 1만1820명이었다. 또한 성을 쌓기 위해 숙지산, 여기산, 팔달산, 권동 등지에서 크고 작은 돌덩이 18만7600개가 채취, 운반되었으며, 여기에 벽돌 69만5000개, 쌀 6200석, 콩 4550석, 기타 잡곡 1050석, 석재 20만1400덩이, 목재 2만6200주, 철물 55만9000근, 철엽 2900근, 숯 6만9000석, 기와류 53만장, 석회 8만6000석 등 전체경비가 87만3520냥과 양곡 1500석에 이르렀다.

이 성곽은 피난처인 산성은 설치하지 않고 보통 때 거주하는 읍성에 방어력을 강화한 것으로, 돌과 벽돌을 섞어 사용하고, 녹로, 거중기 등의 과학기기를 활용하고 재료를 규격화한 점, 도급제와 건축실명제의 실시, 화포를 주무기로 삼는 방어구조 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 중 정약용이 화성을 쌓기 위해 고안해낸 거중기(擧重機)는 서양의 기술을 적어놓은 기기도설(奇器圖說)과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 이래로 쓰여 오던 활차(움직도르래)와 녹로(고정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현대식 크레인으로 10년 예정이었던 수원 화성의 축성 시간을 2년 반으로 단축시킨 일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예부터 내려오던 축성 경험을 바탕으로 선진 과학기술을 도입하여 우리의 독창적인 과학기술을 개발하는데 노력했던 우리 겨레의 슬기와 그 기술의 우수성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고 할 것이다.

▲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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