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수요단상] 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천 년을 산다는 학은 마지막 울음으로 임종을 맞아 허공에 소리를 채우고, 한 번도 꽃을 피우려 들지 않던 난초는 임종이 임박하면 마지막 꽃을 피워 허공을 향기로 그득하게 한다. 살생을 일삼던 여우도 마지막 숨을 거둘 때는 태어난 언덕에 눈길을 준다고 한다. 이처럼 목숨은 마지막을 한없이 경건하게 맞이한다. 다만 인간만 죽음 앞에서 벌벌 떨거나 죽음을 거부하려고 발버둥을 칠 줄을 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은 천명이 무엇이며 숙명이 무엇인가를 몰라서 죽음을 놓고 흥정해 보려고 그렇게 아등바등할 뿐이다.

태어남도 딱 한번 오는 것이고 죽음도 단 한번 오는 것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분명 유무(有無)의 되 바꿈일 뿐 다른 사건이 아님을 많은 성인들이 누누이 밝혀 두었다. 그러나 삶의 애착에 매인 범인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철부지처럼 오는 죽음을 무서워하고 가는 삶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이러한 짓을 흉볼 것은 없다. 무릇 목숨이란 삶을 탐하는 까닭이다. 다만 한 번은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명(命)을 알면 된다.

칠백 년을 살았던 팽조(彭祖)는 요절한 것이고 갓 태어나 죽음을 당한 어린애가 가장 오래 산 것이라고 한다면 부끄럼 없는 삶을 떳떳이 살았다면 아무런 미련 없이 죽음 앞에 마주 서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임종을 앞둔 이러한 사람은 의연한 모습으로 인간을 엄숙하게 한다. 임종 앞에 슬픔이나 이별의 눈물보다도 지나온 삶에 회한이 없다면 경건하게 명(命)에 따라야 함을 보여준다. 이처럼 죽음에 임해서 당당하다면 삶 또한 당당했음을 말하는 것이니 이 얼마나 장엄하고 장대한 인간의 마지막 정리인가.

공자께서 임종이 임박함을 안 자로가 제자들을 불러 모아 장례를 지낼 준비를 서둘렀다. 지위가 높은 분이 타계하면 공식적인 장례식을 치르게 된다. 임금이 죽으면 국장을 지내고 업적이 많은 분이 죽으면 사회장을 지낸다. 자로는 선생의 장례를 그렇게 하자고 제자들 사이를 수소문하였다. 이를 알게 된 공자는 마음이 아팠다. 자로야 너는 오랫동안 나를 속여 왔구나. 아무런 직위도 없는 나를 지위가 높은 분처럼 꾸미려고 하다니 누구를 속이자는 것이냐? 아니면 하늘을 속이자는 것이냐? 이렇게 공자는 자로를 향해 말씀을 주었다. 국장이나 사회장처럼 내 장례식을 치르니 보다 제자들 앞에서 조촐하게 죽어가고 싶다. 내 비록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지 못한들 설마 길가에서 죽어가게 되겠느냐? 이렇게 공자는 임종의 자리에서 자로를 향해 마지막 말씀을 남긴다.

성대한 장례식에는 즐비한 조화가 골목을 채우고 수많은 조문객들이 모여든다. 공자는 이러한 성대한 장례식을 바라지 않는다. 삶을 엄숙하게 산 것처럼 죽음을 엄숙하게 명으로 받아들이면 그만일 뿐 죽음을 치장하지 말라고 한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간에 조문객이 장사진을 치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동네의 개들도 넘보지 않는다는 속담을 헤아린다면 죽음을 치르는 장례식은 참다운 마음만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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