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한 명의 한국 여인이 일천의 중국 장병보다 더 낫다” 1942년 장제스 총통이 한국 여성광복군 1호 신정숙을 일컬어 한 말이다. 백범 김구와 나란히 찍은 사진을 보면 둥근테 안경 너머로 선하게 생긴 눈빛이 단정하면서도 굳센 결기가 느껴진다. 범상치 않은 카리스마가 조용히 주변을 압도했을 것 같은 분위기에 세련미도 풍긴다.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위원 환송기념’ 사진에서는 수많은 남자, 광복군 수뇌부들 틈에 너무도 당당히 군복을 입고 서 있는 그녀를 볼 수 있다. 미덥다. 인생 여정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장제스가 그녀를 두고 한 말이 과연 헛말이 아니었구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장제스 중화인민총통이 인정한 이가 바로 신정숙이다.

그녀는 1910년, 평북 출신 갑부인 독립운동가 신조준의 딸로, 19세에 음성 출신 장현근과 결혼을 한다. 그녀는 결혼 1주일 만에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남편이 윤봉길 의거관련으로 안창호와 함께 체포되자, 옥바라지를 하며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출소한 남편이 말없이 망명의 길을 떠난 후 그녀는 ‘신천부인회’를 조직하여 농가 소득증대와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 운영 등 여성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 아들을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남편을 수소문하며 과감히 중국행을 택한다. 하지만 남편과는 영영 함께 하지는 못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독립운동의 길을 간 것으로 전해진다.

1938년 구이린에서 “조선의용군”에 참여하다가 이듬해 충칭으로 가 임시정부 주석실에서 김구의 비서로 활동한다. 그 후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면서 신봉빈이란 이름으로 입대하여 군사훈련을 마치고 유격작전에도 가담한다. 징모 제3분처로 배치를 받고 회계조장을 맡아 내부 살림을 꾸린다. 이후 1942년 한국광복군 제2지대 3구대 3분대에 편성되어 한인 병사모집과 정보 수집은 물론, 일본의 만행 폭로 연설 등 대적방송공작, 선전활동을 과감히 전개했다. 어떤 남자가 이보다 더 맹렬히 활약을 할 수 있겠는가.

신정숙, 아니 신봉빈!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 암울한 역사의 현장에서 이름을 바꿔가며 온 몸을 던지게 했을까. 아버지 신조준과 언니 신봉조 역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남편 장현근 (1909~1969)도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시댁 본가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녀 역시 자연스레 그 길을 걸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만이 이유였을까.

남편을 찾아 떠났어도 끝내 남편과는 합류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친정어머니에게 맡긴 아들이 눈에 밟혔을 터인데도 그녀는 어머니의 길, 여자의 길보다는 더 큰 시각에서 사람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매년 꼬박꼬박 고국의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다. 강인하고 당당한 여성광복군 1호였던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어머니였음이 느껴져 가슴이 먹먹해온다.

개인 신정숙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온전히 한 생애를 바친 사람, 결기 있는 그녀에게 나라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남편 장현근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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