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6장 접시꽃이 피어 있는 풍경

▲ <삽화=류상영>

이동하는 40년 가까이 세월을 살아온 경륜이나 있지만 애자는 이제 겨우 중학생 일 뿐이다. 그런데도 제 어머니뻘이 되는 들례에게말 한마디 지지 않고 쏘아붙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까 춘임은 소름이 돋았다. 자신도 모르게 알겠구만유. 라고 대답을 하며 정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 말 똑똑히 들어요. 내 밑에 동생들이 세 명이나 더 있어요. 물론 승철이까지 포함해서 말이에요. 나는 말이에요. 그럴리야 없지만 설령 우리 엄마가 어떻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아줌마 같은 여자하고 한솥밥 먹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거든요. 아줌마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거잖아요. 그럼 하루라도 빨리 학산을 떠나가야 하는 것이 도리 아닌가요? 얼굴도 반반한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계속 여기서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우리 형제들이 결코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흥!"

들례는 나이가 어린 계집애가 싸늘하게 쏘아 붙이는 말이 너무 기가 막히다 못해 무섭기까지 해서 대꾸를 하지 못했다. 애자는 들례를 한참이나 쏘아보다 벌떡 일어났다. 춘임이 정지에서 떠 가지고 온 물대접을 쳐다보지도 않고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로 대문을 나갔다.
"머! 저……저런 것이 다 있어!"

들례는 애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서야 새파랗게 어린 것한테 개망신을 당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뛰어나가서 머리채를 다 뽑아버리고 싶었지만 이동하의 장녀다. 너무 분해서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져 버리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애자는 그 뒤로는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들례는 바람에 양철대문이 흔들리는 소리만 크게 나도 애잔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애자가 어느 날 갑자기 표독스러운 얼굴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은 9월이 되어서야 사라졌다. 방학이 끝났으니까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9월이 되자 정성들여 가꾼 접시꽃도 시들고 말았다.

줄기에 수례바퀴처럼 생긴 심피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접시꽃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하루는 춘임이를 켜서 꼬막네를 불렀다.

"사람이 맘 변하는 건 순간이여. 지사날이 될라믄 양력으로 안직 한 달이나 더 남았는데 왜 이릏게 사람을 보채는 거여. 올게부터 정지 일을 한 이삼년 착실하게 하믄 그 집 어른들도 인간이라믄 방에 들이지는 않을망정 방문 앞에는 세워두겄지. 그릏게사오년 차분히 지사에 참석하다보믄 부면장님도 들례를 첩으로 인정하는 날이 올거잖여. 들례 나이가 대관절 올해 및 살여. 갑자년 생잉께 쥐띠 서른한 살이잖여. 환갑까지만 산다 해도 앞으로 삼십년 이상은 너끈히 살 사람을 지달리는 데 그깐 한두 달을 못 참아!"

접시꽃처럼 빨간 치맛단으로 마당을 질질 끌며 들어 온 꼬막네는 도리어 호통을 쳤다.

"허긴, 핏덩이 같은 승철이를 큰집으로 보내고 팔 년 가차운 세월을 등신츠름 살아왔는데 그깐 일 년을 못 참을까."

꼬막네가 큰소리를 치는데 반박을 할 근거가 없었다. 오히려 언젠가는 첩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반갑기도 했다. 꼬막네가 복채로 받을 쌀 두 가마니가 탐나서 거짓말을 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쌀 두 가마니 값을 돌려달라고 했다가는 어쩌면 저주를 받을 지도 모른다. 이왕 접시꽃을 심었으니 효험이 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위로하며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소식을 들은 것은 한 달 후다.

장날이라서 장터에 열무거리를 사러 나갔던 춘임이 미친개한테 쫒기는 년처럼 헐레벌떡 뛰어 들어 왔다. 춘임은 다리를 동동 구르면서 한참 동안 제 가슴을 두들기며 마른침만 꿀떡꿀떡 삼키고 입을 열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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