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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座)
김정렬  |  news@ccdail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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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08.25  19: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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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렬
수필가
시야에 들어오는 온갖 사물들이 제 자리에서 자신의 격을 지키고 있는 성 싶어 보인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꼬리를 문다. 저마다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과연 나는 내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자리는 어디인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분수를 지키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생활의 중심을 잘 잡고 자세를 낮추어 항시 겸손하면 다른 사람의 귀감이 될뿐더러 곤욕을 치르는 일도 훨씬 덜하다. 하지만 분수에 넘치고 교만하면 흔들리고, 넘어지거나 엎어지기 쉽다. 공중에서 줄을 타는 곡예사는 위태로워 보이지만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이는 것은 자기 자리에서 중심을 잘 잡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는 모든 일의 시발점이다. 한 계단 올라 갈 때마다 첫발을 들어 올리게 되는 자리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에도 첫발을 움직이게 되는 자리이다. 뒤로 물러설 때에도 첫걸음이 되는 자리이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게 되는 때에도 시작이 되는 자리이다. 이렇듯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정확하게 가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사람이 서 있는 자리는 좋은 자리만 있는 게 아니다. 때로는 위태로운 자리도 있다. 자기 마음대로 옮겨 앉을 수 있는 자리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자리도 있다. 지킬 수 있는 자리도 있고, 지키지 못하는 자리도 더러는 있다.

유년시절 뒤뜰의 노란 탱자나무 가지가 휘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따라 장독대 주위엔 어머니의 정성을 담은 딸기가 무성한 초록의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차마 부끄러운 듯 탐스런 열매는 고개를 내밀지 못하고 열매를 잉태하느라 몸살을 앓는 미세한 경련이 느껴졌다.
집을 지키는 어린 막내인 나만이 속이 쓰릴 만치 딸기를 따먹다 장독대 뒤로 몸을 숨긴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흐느끼는 양 어깨에 딸기 잎사귀 같은 가느다란 떨림이 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사연이었을까.

몸이 약하신 아버지의 몫까지 농사일을 도맡아 하시면서도 그 억척스러움만큼 좀체 근심 걱정일랑 전혀 내비치지 않으시던 어머니였다. 나는 그토록 우는 어머니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탱자나무 가시 같은 할머니의 억지 섞인 시집살이 때문일까?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가 딱해 보였다. 도망이라도 가시라고 수십 번 허락했다. 그러면서도 밤만 되면 언제나 어머니 잠옷 꼬쟁이를 꼭 붙들고 잠들었다.

"엄마, 결혼해서 어찌어찌 하다 맏이를 낳았더라도 할머니 시집살이 무서운데 그때 진작 도망가지 그랬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수십 번 그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자식과 가정의 희생양이 되기 위해 떠나지 못하고 어머니의 자리를 지켜 오셨다.

요즘도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알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공인으로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시기에 무리하게 지키고 있다가 그 시기를 놓치고 자기 의사와 반하여 쫓겨나게 되는 일도 허다하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쫓겨나 후세의 지탄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 자리는 과연 자기에게 합당한 자리인가. 자기 능력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경우에는 그 자신이나 관계되는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모두가 불편하고 불행한 일이다. 누구든 그 자리에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야 할 일이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힘에 부치면 물러날 용기도 있어야 한다.

요즈음 물 좋은 자리를 감당하지 못한 탓에, 무리해서 좋은 자리를 누린 탓에, 여러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는 사람을 자주 본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다. "높은 신분에 따르는도덕적 의무와 책임"이란 뜻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도덕적이고 정직해야 하고 헌신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는 안전하게 지킬 자리인가. 비켜주어야 할 자리인가. 앞으로 도약하기에 합당한 자리인가.

인사발령이 있을때마다 내 자리 좌우에도 새로운 얼굴들이 자리를 잡는다.생소하고 어색한 공기 속에 양쪽 겨드랑이부터 긴장감이 당겨온다.

자리에 연연해하기보다는 자리에 맞는 처신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과연 내 자리에 걸맞은 사람인가. 이따금 나도 내 자리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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