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감옥

아주 어릴 때 본 영화 <빠삐용>(프랭크린 샤프너 감독· 1973)에서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은 주인공이 감방에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를 먹으려고 잡는 장면이다. 벌레를 잡아먹는 그의 처참한 모습이 놀랍게도 '유혹을 견디는 참다운 인격'을 보여주는 것임을 최근 영화를 다시 보면서 알게 되었다.

살인 누명을 쓰고 종신형으로 프랑스령 기아나 수용소에 이송된 빠삐용은 폭행당하는 죄수 드가를 돕다가 간수에게 추격당해 첫 번째 탈옥을 감행하다 체포되어 1년간 격리 수용소에 갇힌다. 드가가 그의 배식 통에 매일 코코넛 열매를 몰래 넣어준 것이 탄로나 감시관으로부터 심문을 받지만 이름을 밝히지 않아 식사 절반 감량, 6개월간 햇빛 차단이라는 극심한 처벌을 받게 된다. 극심한 기아에도 심문에 응하지 않던 그가 이빨마저 빠지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감독관을 부른다. 막상 문의 구멍으로 고개를 내밀고 감독관을 보는 순간 차마 이름을 대지 못하고,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문을 닫고 돌아서서 드가의 쪽지를 씹어 삼킨다. 지네와 바퀴벌레로 허기를 채우는 것, 그것은 바로 친구에 대한 신뢰를 지키느라 그가 치룬 대가다.

<빠삐용>이 보여주는 감옥을 물리적인 공간으로만 본다면 거리를 활보하는 우리의 삶과는 무관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를 가두는 좌절과 두려움, 부정적인 생각과 무기력이나 우리를 좌절시키고 억압하는 사회적 제약과 편견, 이 모든 보이지 않는 구속도 상징적인의미의 감옥이 될 수 있다. 스스로의 틀이나 외부의 압력에 속박되어 있거나 무가치하게 인생을 흘려보낼 때 몸은 자유로워도 삶은 무기력하게 감금되어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감옥 탈출은 바로 우리가 결행해야 할 도전이다.

그런 의미에서 빠삐용이 격리 수용소에서 꾼 꿈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의미심장한 암시를 준다. 그는 꿈에서 사막 위에 일렬로 있는 재판관 앞으로 다가간다. 죄명을 묻는 재판관에게 그가 살인혐의를 부인하며 결백하다고 항변하자 재판관은 "알고 있다. 하지만 살인과는 무관하게 너는 죄를 지었다. 인간으로서 가장 중죄, 인생을 낭비한 죄다"라며 유죄를 선고하고 죄형은 사형이라고 말한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배심원들의 유죄선고에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 걷다가 잠이 깬다.

그는 감옥에서 바깥세상에서 낭비한 인생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치열하게 몸부림쳤다. 굶어 죽어가면서도 타인의 삶을 보호해주고, 여러 차례의 실패와 고통스러운 처벌에도 굴하지 않고, 죽어서만 나갈 수 있는 마지막 유형지 '악마의 섬' 절벽을 뛰어내려 코코넛 자루를 타고 마침내 바다를 건넜을 때 그가 얻은 것은 육체적인 자유뿐만 아니라 폭력에의 굴복과 좌절, 두려움과 불신의 보이지 않는 구속의 틀을 부수는 정신적 가치다.

자기가 잡은 거대한 물고기의 살이 상어 떼의 습격에 완전히 다 떨어져 나가 해변에 도달했을 때는 앙상한 뼈만이 상처뿐인 승리의 전리품으로 남았다 해도, 끝까지 싸우며 자신을 극복한 그것만으로 충분할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처럼, 서서히 죽어가는 독방에서 숫자를 세며 걷고, 팔굽혀펴기를 하고, "나는 건강해진다, 나는 건강해진다"고 자기 암시를 하며 자신을 지탱하고, 끝까지 자유를 포기하지 않았을 때 무엇보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인생을 낭비한 죄'를 떨쳐버렸을 것이다.

인생을 낭비한 죄로 우리의 삶이 심판받는다면, 과연 결백을 자신할 수 있을까? 자기를 희생해 신의를 지키고, 벌레를 끼니로 삼아 허기를 채우며 살아남아, 끝까지 자유를 희망한 빠삐용에게서 인생을 낭비한 죄 형량을 줄여갈 힌트와 용기를 얻고 싶다.


▲ 황혜영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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