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호서 대연합 군진 형성된 요충지

동학혁명사에서 논산은 전봉준이 이끄는 호남 동학혁명군과 손병희가 이끄는 호서 기호지방의 동학혁명군이 대연합군진을 형성한 곳이다. 그러나 논산은 이런 단순한 의의보다는 민란으로 비롯된 동학 혁명의 뿌리가 자못 깊은 지역이다.

● 1893년 현감 황후연 쫓아낸 노성 민란

동학혁명 전 해인 1893년 12월에 노성 민란이 발생했다.

전 노성현감이전운소(轉運所)에서 운송하다 남은 미곡 400석 중 200석을 착복하였는데,신임 현감 황후연(黃厚淵)이 200석을 농민들에게 부담 지웠다.

이엄 탐학 행위에 격분한 농민들이 봉기하여 관아를 점령하고 현감 황후연을 쫓아낸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에서 장두는 유치복이었고, 처음 봉기를 주장한 사람은 윤상건(尹相建) 박관화(朴寬和) 이성오(李成五) 윤상집(尹相執) 윤성칠(尹成七) 윤자형(尹滋馨)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도망쳐서 처벌할 수 없었고, 대신 백화서(白化西)만주동자와 부화뇌동하여 참여한 죄 를 물어 세 차례에 걸쳐 엄하게 다스린뒤 원악도(遠惡島)에 유배를 보내는 처벌을 받는다.



● 민란의 여진으로 노성지방에서 기포

12월에 발생한 민란의 여운이 남아 있었을 시기인 1894년 8월, 노성 지방의 대 성인 파평 윤 씨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송정섭은 동학교도들이활발하게 활동하던 노성에 윤자신에게 전달할 밀지를 가지고 왔다.

송정섭은 이들과 함께 기포하고자 했던 것이다.

송정섭은 윤 씨의 재궁(齋宮)인 정수암(靜修庵)을 거점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9월초 정수암에 들른 면암 최익현에게 국왕이 창의하라는 밀지를내렸다는 사실을 알리고 최익현의 참여를 부탁하여 의병을 구성하였다.

의병 지휘는 고산(高山)의 윤진사로, 종사관들은 모두 만석지기 부자들이었다.

한편 최익현이 돌아간 뒤 송정섭은 창의를 권하는 윤음을 가지고 동학12포(包)를 순시하였고, 이를 계기로 각지 동학 조직과 유림 간에 연계가이루어졌다.

또한 파평 윤씨들과 인근 사대부들도 정수암에 빈번하게 출입하였고, 부호들은 양식을 출연했다.

뿐만 아니라 밀지의 진위여부를 확인한 노성현감 김정규도 쌀을 내어 의병의 기의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노성 근방의 보수유림, 수령, 동학혁명군이 연합해서 창의를 준비해 나갔으니 이는 당시 외세에 저항할 합리적인 대응이었다.

결국 기포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흩어졌으나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 세력들이 민족적 위기를 함께 극복하고자 연합 의병을 결성하려던 시도는 이지역만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 8월 노성 은진 현아를 쳐 무기 탈취

논산지역 동학혁명군 활동은 2차 재기포 시기 이전인 1894년 8월에 이인(利仁)의 동학 도집강(都執綱)의 김창순(金唱順)이 노성 현의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노성 현아를 쳐서 무기 를 탈취한다.

특히 노성 현은 한 해 전에 있었던 민란의 여파로 인해 동학교도들이 쉽게무기를 탈취할 수 있었다.

호남-호서 대연합 군진 형성된 요충지전봉준 손병희 합류…소토산에 대본영 설치공주 우금치 전투 동학연합군 대패 비분강개9월 기포 이후 논산 지역 동학혁명군 투쟁 활동은 규모가 큰 조직보다는주로 소규모로 활동했는데, 6~7명의 교도를 거느린 접주가 두령이 되거나때로는 수십 명의 동학교도로 구성 되었다.

특히 연산의 박영채(朴永采) 접주와 은진의 염상원(廉相元) 접주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9월 재기포 시기가 되자 은진 지역에서는 은진 현아를 습격하여 현감 권종익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 9월 재기포와 논산 연합군 형성

1894년 9월 13일, 전라도 삼례에서 재 봉기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혁명군은 무장을 하는 동시에 충청지역의 동학혁명군과 연합하기 위해 약 1달을주둔하고 있었다.

9월 18일 재기포가 선언되자 전봉준은 10월 11일 삼례를출발하여 북상을 시작한다.

전봉준은 논산 연합지역을 보위하기 위하여 10월 6일경 선봉대를 파견하여 먼저 은진 현을 점령하고, 한밭까지 진출 했다가 충청 감영병 80여 명을격파하는 전과를 올린다.

의기충천한 전봉준은 4천여 명의 동학혁명군을 인솔하여 10월 12일 논산에 도착했다.

전봉준은 먼저 국문 격서(檄書)를 통해 경군(京軍)과 충청도 감영군에게일본으로부터 유린당하고 있는 국가 안위를 알리고, 백성들에게 이를 알리는 고시문을 발표한다.

고시문에 동학군과 정부군은 서로 도(道)는 다르지만 일본침략군을 반대하는 척왜(斥倭)와 척화(斥華)는 그 뜻이 동일하니조선 사람끼리 서로 싸우지 말고, 동학혁명군과 정부군이 연합하여 함께 척왜 척화하여 조선이 왜국에 침략당하지 않도록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하자고 호소한 것이다.

한편 충청 호서지방의 동학혁명군은 2세 교주 최시형의 명에 따라 경기충청도 강원 등 각지에서 봉기하여 보은 장내리 동학 대도소에 집결한 뒤 손병희의 인솔로 논산을 향해 출발한다.

전봉준과 손병희가 논산에서 합류하여 형제결의를 하고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논산 소토산(小土山)에 대본영을 설치한다.

소토산의 위치를 두고 이견이 있지만, 평야지대의 논산에서 어느 특정한 산을 지칭하기보다 작은 흙산 이라는 보통 명사의 지역으로, 정황으로 천주교회가 들어선당재가 유력하나 이도 확실하지는 않다.

당시 연합군의 군세는 10만 혹은 20만이라는 기록도 있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약 2만명설이 유력하다.

10월 17일, 전군의 두령들을 모아 작전계획을 세우고, 동학연합군은 20일 미명을 기하여 연합군은 공주를 치기 위해경천방면으로 진출한다.

여산 접주 최난선은 소토산에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연합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비분강개하여 자신의 군사와 패한 군사들을 모아 황화대에 진을 치고 추격해 오는 관 일본군을 맞아 최후의 일전을 준비한다.

이 전투에서 '가까운 밭에 죽은 시체와 머리가 눈에 걸리고 발에 채이다' 의 참혹한 패배를 당한다.



논산시가 전경. 전봉준과 손병희는 이곳에서 합류하자 형제 결의를 하고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추대하는 한편 논산 소토산(小土山)에 대본영을 설치한다.





왼쪽 사진은 파평 윤씨 종학당. 민란시기와 동학혁명 시기에 파평 윤씨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오른쪽은 연산아문.



채길순 소설가 ·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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