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7장 가을 이야기

▲ <삽화=류상영>

벼를 흝어 낸 짚단 중에 좋은 것은 지붕에 이엉을 하고, 새끼나 꼬거나 가마니를 짜는데 사용할 목적으로 헛간에 잘 쟁여 놓는다. 또는 소 먹이나 외양간에 깔아준다. 소에 밟혀서 소똥과 뒤섞인 거름은 다시 논에 뿌려져서 새로 자라나는 모의 영양분이 된다. 곧 벼를 심고 수확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윤회輪回와 같은 것이다.

논에는 벼가 자라고 있어야 한다. 벼가 자라고 있을 때는 비록 타작을 하고 나면 빈쭉정이 만 남을 망정, 저 놈을 수확해서 이리저리 궁리를 하면 올 겨울은 먹고 살 수 있을 테지. 하는 희망에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그러나 벼를 벼내고 밑둥치만 남은 논은 올 가을에도 채우지 못한 두지의 크기만큼 허망감 같은 것을 안겨준다. 늦가을 바람이라도 성가시게 부는 날 논바닥 여기저기 남은 북데기 들이 허공으로 휘몰아치기라도 하면 그 허망감은 쓸쓸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논바닥은 비어 있지만 아직은 홑바지에 홑저고리를 입고 있어도 바깥 날씨를 견딜 만하다. 여름 네 논둑에서 살던 사람들은 고구마 밭에서 고구마를 캐고, 콩을 베고 김장에 사용할 무며 배추밭을 돌보기 위하여 손바닥만 한 밭에 매달려 있다. 그마저 일이 없는 사람들은 가깝고 먼 산으로 몰려가서 아직 풋내를 품고 있는 나뭇가지를 베고 갈대를 베어서 땔나무를 하고 있다. 성질이 급한 이는 아직은 이른데 보리밭에 거름을 내는 이들도 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시간이다.

둥구나무 밑에는 학교에 다니지 않은 예닐곱살 먹은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몇 명이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땅에 금을 그어가며 땅 따먹기를 하고 있다. 너럭바위에는 순배영감과 변쌍출이 텅 빈 들판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즘심들 자셨슈?"

골목 안에서 보은댁이 손자를 포대기에 업고 슬슬 걸어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순배영감과 변쌍출은 피우던 담배를 서둘러 끄고 슬그머니 너럭바위에서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 온 보은댁이 그녀답지 않게 배시시 웃는 얼굴로 말을 건다.

"아, 예……"

순배영감은 쓴 웃음을 지으며 보은댁이 업고 있는 아이를 바라본다. 잘사는 집 손자답게 털실로 뜬 모자를 쓰고 있는 아이의 눈빛이 똘망똘망하다.

"야 좀 봐유. 우리 손주라 그런지 모르지만 맨날 바라보고 있는데도 다른 집 애기들 보다 빨리빨리 크는 거 가튜. 백일 지난지가 한 달도 안 된 거 같은디."

보은댁은 승우라고 이름을 진 손자를 동네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일부러 나왔다. 변쌍출에게 등에 업은 승우를 보여주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음메, 애기가 작은마님 얼굴을 아주 빼다 박었구먼. 우짤까나! 이릏게 이쁜 애기가 먼 할 일이 그릏게 많다고 인제 나왔댜. 즈 엄마 나이가 한 살이라도 짝을 때 나왔으믄 젖심이라도 좋았을 건데 말여."

김춘섭의 아내 철용네가 마당에서 콩을 털다가 일부러 보은댁 옆으로 와서 호들갑을 떨었다.

"즈 어머 젖이 남아돌아서 맨날 짜내기 바쁜데 머. 젖이 을매나 많은지 쌍둥이를 키워도 남을 껴."

보은댁은 철용네의 말이 빈정거리는 말로 들려와서 일부러 옥천댁이 건강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순배영감과 변쌍출은 한마디 씩 했으니까 인사치례는 했다는 얼굴로 너럭바위에 앉아서 들판을 바라보았다. 철용네는 삐죽 인사만 하고 갈 수가 없어서 승우의 손을 잡고 흔들어 주며 장차 큰 인물이 되겠다고 덕담을 했다.

"어이구, 우리 도련님 바깥나들이 나오셨구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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