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7장 가을 이야기

▲ <삽화=류상영>

해룡네는 더 이상 있어 봤자 상대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팔짱을 낀 체 입술을 삐죽거리며 돌아섰다. 황인술이 턱으로 자기 집 쪽으로 가는 해룡네를 가르키며 물었다.

"암 것도 아녀."

순배영감은 담배 연기를 내 뿜으며 들판 쪽을 향해 돌아앉았다.

"보은댁이 이븐에 난 손자를 업고 나왔잖여. 해룡네가 갸를 보고, 머하느라 이릏게 늦게 나와서 옥천댁 맘고생이 심했니 어쨌니 했싸니께 보은댁이 승질이 나서 가 버렸잖여. 그것 땜시 그러는 거여."

"먼 말인지 알겄구만유. 해룡네 말이 틀린 말은 아니구먼. 이병호 그 인간 승질에 큰 아 한티 재산을 물러 줄 거 가튜?"

황인술은 이병호가 땅을 내 놓겠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타작이 끝나면 부를까, 나락을 다 말리고 나면 부를까, 하고 기대만 하고 있다가 박태수로부터 땅을 내 놓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듣고 나서 또 속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병호에 대한 감정이 안 좋은 상황이었다. 변쌍출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울고 싶은 아니가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대 놓고 욕을 해 댔다.

"자네, 왜 그랴?"

순배영감이 들판을 바라보면서 등 뒤에서 들려오는 황인술의 말이 지나쳤다는 생각에 물었다.

"지가 멀유?"

"오늘 하루만 살다 갈 사람츠름 보여서 묻는 말 이잖여."

"지는, 머 감정도 읎는 사람인감유?"

"자네가 왜 그릏게 승질을 내는지는 알겄어. 하지만 명색이 구장이라는 사람이 그깐 일로 흥분해서 앞뒤를 재보지도 않고 화를 내싸믄 되겄는가?"

"형님도 별 말씀을 다 하시네. 아, 구장이 못할 말을 한 거유? 한두 번도 아니고 모심을 때만 되믄 땅을 내놓겠다고 사탕발림을 해설랑, 엄한 사람 멀쩡하게 진을 다 빼놓고 타작이 끝나믄 땅 내 놓을 생각은 안하고 먼 산만 쳐다보고 있응께 구장이 승질 날만도 하지."

변쌍출은 담배를 다 피우고 난 후에 쌈지를 폈다. 쌈지 안에서 손가락 길이의 철사토막을 꺼내 대통에 묻어 있는 담뱃진을 긁어냈다. 철사 끝에 묻는 까만 댓진을 검정고무신발바닥에 문지르며 황인술을 두둔했다.

"그렁께 농사꾼은 대학을 나와도 무식하다는 말을 듣는겨. 시방까지 농사짓고 살믄서 한 두번 속아 봤어? 아! 해방 되고 네 해만인가. 그 머셔, 기축년 농지개혁 때 우리 동리서 혜택을 본 사람이 및 명이나 있어?"

순배영감이 바짝 말라서 살가죽만 붙어 있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쓰윽 쓰다듬으며 둥구나무를 바라본다. 며칠만 있어도 낙엽이 질 것 같다. 낙엽이 지는가 싶으면 찬바람이 불 것이다. 찬바람이 불면 둥구나무 밑으로 마실 나오는 것도 중지다. 나무가 커서 바람도 크다. 비싼 밥 먹고 감기 걸려서 아랫목차지하고 누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년 봄이나 되어야 바람도 부드러워 질 것이다. 그 때까지는 겨울잠을 자듯 집안에서만 지내야 한다. 긴 겨울 동안 쥐죽은 듯 집안에서 세월을 보내다 보면 하루가 다르게 체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웃에 마실을 가고 싶어도 나이 차이가 많아서 마땅히 갈 곳이 없다. 변쌍출이 놀러오면 둘이 앉아서 가물가물 기운이 없는 목소리로 옛 기억을 더듬는 시간들이 유일한 소일거리인 겨울은 무섭도록 싫다. 그래서 늘 이맘때가 되면 내년 봄에도 이 너럭바위에 앉아 있을까 하는 생각에 우울해진다.

"크음! 우리 동리서 혜택을 보기는커녕 손해 안 본 집이 읎지. 농지개혁이 있을 거라는 걸 미리 안 면장 춘부장이 도지를 붙이고 있는 땅을 죄다 소작인에게 팔아 냉겼잖여. 우린 그것도 모르고 동리 사람 앞앞이 추렴을 해서 돼지를 잡았잖여. 인제 소작인 신세를 면했다고 잔칫상을 차려 놓고 장구치고 꽹뱅이를 치믄서 춤들을 추느라 요 앞에서 난리가 났었잖여."

<계속>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