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부, 쿠처의 키질석굴

▲ 사진1 키질석굴 전경 사진 2 1500년 된 벽화의 모습(사진촬영금지라 사진첩에 있는 그림을 촬영하였다) 사진 3 10굴에 있는 한낙연에 대한 기록(사진촬영이 안되어 다른 자료를 구하여 올려 본다) 사진 4 1970년대 복원하기전의 키질석굴모습 사진 5 키질석굴 앞에 있는 무자라트 강변 초원의 모습, 아름다운 곳이다.
천산신비대협곡에서 되돌아오는 도중 무초산 염수계곡 입구에서 만나는 갈림길 우측으로 길을 따라가면 사막으로 시원하게 뚫린 포장된 길을 따라가고 마귀협곡이니 하는 다른 자연풍경지대가 있음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들이 나온다. 이 지역은 건조한 사막기후에 풍화작용으로 기형적인 자연풍경을 보여주는 곳이 많이 있는 것 같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지루한 시간을 달래며 가이드 이군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여 보나 시원스런 대답이 없다. 고선지 장군을 비롯하여 혜초 스님, 이곳의 지명 등을 현지가이드에게 물어서 전달을 하고 있으나 대답이 그저 그렇다. 어제부터 이군에게 실크로드 가이드로 나섰으니 공부도 하고 지리도 익혀 훌륭한 안내원이라는 소리를 듣도록 하라고 하자 나름대로 성의를 보인다. 책도 보고 주변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내게도 와서 고선지 장군에 관한 질문을 하는데 나 역시 어설프게 알면서 나서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더구나 중국의 끝과 끝인 이곳에서 흑룡강성출신으로 실크로드의 기본교육을 받고 현지가이드로 나선 한족 여성가이드에게 무엇을 바랄까? 무초산 이라고 가르쳐준 것도 천산산맥 중 밍우타그산의 한 산줄기(차르타그산, 불모의 산)인 것을 후에 알게 되는데 풀이 없으니 불모의 산이나 무초산도 다 맞는 것 같다.
사막을 벗어날 무렵 붉은 산들이 보이고 일본 알프스의 설벽 같은 높은 흙벽 사이로 버스가 빠져나오자 무자라트 강이 시원스런 모습으로 다가온다. 수량이 많아 보이니 지금까지 보아온 물줄기 중 가장 큰 것 같다. 언덕을 내려가니 좌측 산기슭에 벌집처럼 만들어진 석굴들이 보이고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1994년 만들어진 구마라습의 청동좌상 앞에 선다.
구마라습(344~413)은 인도스님으로 인도인 아버지와 구자국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한다. 7세에 출가해 여러 곳을 다니며 불법을 전하였고, 구자국에서 대승불교를 포교를 하였다 한다. 383년 진왕(秦王)이 여광(呂光)을 시켜 구자국을 점령하자 양주를 거쳐 장안에 머물며 많은 경전을 번역하여 성실론(成實論), 십송률(十誦律)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아미타경(阿彌陀經), 중론(中論) 등 경률 74부 380여권을 펴냈다 한다. 어렵고 많은 내용을 잘 알 수 없으나 불교를 위하여 노력하고 이를 확립하였다는데 그 뜻이 있다 하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용어 색즉시공, 공즉시색, 지옥이니 극락이라는 말들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그를 삼론종(三論宗)의 조사(祖師)로 부르고 있으며 413년 장안의 대사(大寺)에서 69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안내소에 짐을 맡기고 사진촬영금지, 손으로 만지지 말 것 등 주요사항을 전달 받은 후 계단을 올라 현지안내원과 석굴로 향한다. 키질석굴은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어 있고 우리는 서편 쪽에 개방된 몇 개의 굴만을 만나보기로 하였다. 번호로 된 석굴을 처음 접하였을 때 이곳은 석굴이 아니라 토굴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안내원이 만지지마시오 하며 강조한 이유가 고운 모래로 된 사암지대이나 단단하지 못하여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너무 쉽게 부서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동쪽 편 석굴은 개방을 하지 않고 있는데 나중에 복원하여 관광객들을 다시 불러 모을 것이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키질 천불동은 중국 4대 불교석굴중의 하나로 3세기부터 동굴을 파기 시작하여 9세기까지 약 60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승려가 1만 명을 넘었을 만큼 이곳의 불교가 흥성하였다고 하나 지금의 모습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석굴벽화의 주요내용은 주로 불교와 관련된 전설과 부처의 생애를 그리고 있으며 중국의 동굴벽화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 키질석굴은 중국에서도 가장 초기에 만들어진 석굴이기 때문에 연구 가치가 매우 높은 곳으로 평가를 받고 있으며 지금은 사라진 마니교(3세기경 페르시아왕국 마니가 창시한 이란 고유의 한 종교)의 그림이 남아 있다 하나 잘 알 수 없고 인도와 간다라의 양식과 기법이 보인다는 것이 특징이다.
짧은 시간 제한된 석굴의 관람으로 자세한 부분을 알 수 없다. 한 가지 실크로드에 천불동이라고 표현하는 석굴지대가 많이 있는데 이것은 천개의 부처상이 있어 천불동이 아니라 부처님이 그만큼 많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은 파손된 석굴로 올라 가는 계단을 만들고 관람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놓았으나 옛날의 자료를 보면 폐허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
계단에 올라 석굴 앞에 서서 보니 동쪽방향으로 전망이 좋은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어 시원스런 전경을 보여주는 무자라트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천년세월을 뛰어 넘어 보려하나 다가오지 않고, 삭막한 사막 한가운데 험악하게 보이기도 하는 협곡사이로 푸른 초원이 펼쳐지며 호수처럼 잔잔히 흘러가는 수면을 바라보고 있다. 강변의 초원사이를 조용히 걸어보며 그 옛날 이곳 석굴에서 깨달음을 얻으려한 스님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고자 하나 쉽지가 않는다.
석굴입구에서 보면 아침햇살이 제일 먼저 석굴을 비추도록 조성하였다고 하던데 새로 복원한 상태의 석굴입구로는 이른 아침 해를 바라보기 어려울 것 같다. 그저 더 이상 도굴이나 당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키질석굴을 찾아보며 제 10굴에 들렸을 때 놀라움을 뭐라고 말할까. 이곳에서 만나는 조선족 화가 한 낙연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한민족의 흔적이 이곳에 진하게 남아 있음에 동방의 작은 나라 한민족의 대단함을 느낀다.
조선족 화가 한낙연(1908~1947). 길림성 용정 출생. 상해예술전문학교와 파리 루브르예술학원 졸업. 1930년대에 귀국하여 1946년 6월 10일간 키질석굴을 방문한 후 서역 예술조사 작업에 몰두를 하였고 1947년 7월 30일 키질석굴 조사 후 우루무치를 거쳐 난주의 집으로 돌아가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 1993년 북경에서 한낙연 유작전이 열렸었다고 한다.
10굴의 석굴 한쪽에 그가 잠을 자던 흙침대 자리가 있고 초상화와 함께 그가 남긴 글귀가 벽에 남아 있어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
키질석굴이 단단하지 못한 석굴로 풍화작용에 의하여 황폐화 되고 있으나 결정적인 파괴의 모습은 인간들의 손에 의하여 망가지고 있다. 이군의 설명과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불교와 이슬람교의 오랜 종교전쟁으로 불교가 밀리자 이슬람교 사람들에 의하여 불상들이 많은 훼손을 당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아프카니스탄의 바미얀 석굴을 폭약으로 폭파하기기도 하니 종교라는 것이 무엇인지.
키질석굴을 포함하여 실크로드 대부분의 석굴벽화의 부처 얼굴이 눈이나 코가 파헤쳐지고 망가져 있다. 실크로드의 유목민들이 양떼를 몰며 다니다가 비가 오면 석굴로 양떼를 몰아넣고 비를 피하는 바람에 석굴이 훼손되고, 특히 유럽의 많은 고고학자, 탐험가들이 탐사라는 핑계아래 벽화를 떼어내고 유물이나 서적들을 훔쳐가는 도둑질로 상당부분이 망가져 있는 가운데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떠도는 실크로드의 유물이 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문화혁명 때 구시대 유물은 물러가라는 사회주의 운동으로 많은 유물이 망가지는 수난을 당한다. 가까운 일본 또한 탐험이라는 또 다른 침략으로 벽화를 뜯어내고 유물들을 훔쳐갔다. 일본인들의 도적질에 미안한 마음으로 석굴 한곳에 일본인이 기증한 목조각 불상이 있다.
키질석굴을 내려서며 우리의 보물인 석굴암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석굴암을 훔쳐가려 하였다는 내용과 석굴암을 보수하며 충북 괴산의 원풍리 마애불상을 참고자료로 했다는 나그네들의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 우리고장 청주의 대청호반 가까이 문의면 두루봉 석회암 동굴에서 4만 년 전의 유골인 흥수아이와 짐승 뼈가 발견되며 전 세계로 알려지던 일들이 생각난다.하지만 세계적인 유물 발견지역인 두루봉 동굴은 석회석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매우 귀중한 유물들이 우리 손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 것을 어찌할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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