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부, 실크로드 서역남도 호탄의 흥망

호탄에 도착한 오후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호탄의 옛 유적을 찾아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고성으로 가고 있다. 백옥강을 따라 가다 포장도로를 벗어나서 비포장 길을 들어서니 길 다운 길은 없고 버스가 가면 그게 길이다. 길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자갈밭을 이리저리 가다보니 옥을 찾기 위해 강변을 훌렁 뒤집어 놓은 것처럼 파헤쳐 놓은 강이 나온다. 이군에게 옥이나 찾아보자고 하자 "옥을 알면 제가 가이드를 하고 있겠습니까?" 하며 옥 찾는 것이 쉽지 않음을 말하여 준다.
잠시 후 강 옆으로 작은 마을이 나오고 버스에서 내리기도 전에 갑자기 마을사람들이 부지런히 당나귀 마차를 끌고 달려오기 시작한다. 연락도 없이 도착하는 관광객들을 잡기 위하여 마을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 나오는 모습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려는 경쟁 때문에 걸을 수 있는 아이들까지 모두 동원한다. 대 여섯 살 되어 보이는 아이들부터 남여를 구분하지 않고 만삭이 된 아주머니까지 대단하다. 집집마다 포도덩굴이 덮여있고 집 앞의 작은 도랑으로 만년설이 녹은 물이 탁한 모습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우리는 마차에 3~4명씩 올라앉아 먼지를 막기 위해 마스크를 하고 유적으로 향한다. 아이들은 캔디를 달라며 보채고 마음이 여린 누군가 사탕과 돈을 주자 우리마차 주변으로 몰려든다.
우리가 탄 마차는 열 살 정도로 보이는 당찬 소녀가 동생들을 돌보며 마차를 끌고 있다. 뒤에서 마차를 끌고 있는 다부진 마부소녀의 얼굴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흐르니 애처롭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한 모습에 볼펜을 하나 주자 고마워한다. 우리 마차를 끌던 당찬 소녀는 갑자기 내 옆으로 간난 아기를 데려와 앉히고는 캔디나 돈을 달라하고 아이를 위해 수건도 좋고 모자도 좋으니 벗어 달라며 손짓 발짓으로 하는 만국어를 한다. 허참, 난처하기도 하지, 스카프를 쓰고 있는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동생은 돈만 생기면 모두 챙긴다. 아마 경리 담당인 것 같은데 나중에 보니 모든 돈은 아빠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다. 아이는 울어대고 어른은 웃고 일행들은 새로 생긴 아들이냐며 한바탕 웃음바다, 우리마차의 당찬 소녀는 집을 보여주며 은근히 자랑을 하며 열심히 일하여 지은 집이라고 하는 것 같다. 이곳의 어른이나 아이들 모두가 돈을 벌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 같다. 앞서서 마차를 끌고 있는 배가 부른 아주머니는 사람들에게 아이들이 셋이라며 도움을 청하는 모양이고 옆의 아기는 울다 웃고를 반복하다 잠이 들었다.
당나귀마차 뒤에 실려 자갈이 많은 시골의 언덕길을 오르니 덜컹거리는 그 느낌이 소년기에 아버지를 따라 쌍곡계곡으로 소달구지를 끌고 동생들과 함께 나무하러 가던 일이 생각나게 한다. 그 소달구지는 지금 시골집 거름더미 뒤에 방치되고 있어 나무는 썩고 바퀴와 쇠붙이만 남아 소달구지의 형체만 겨우 남아있다. 우리의 예전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마이리크와트 고성유적을 가고 있는 리어카를 개조하여 당나귀 마차로 관광객을 실어 나르며 돈벌이를 하고 있는 이 마차는 언제까지 남아 있을까. 이곳에 포장도로가 건설 될 때면 이당나귀 마차도 집 뒤에 처박혀 있지 않을까?
누군가가 준 사탕을 물고 잠든 아기의 치아를 보니 사탕을 너무 먹어서인지 두 살배기의 치아가 많이 썩어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마을 앞으로 도로가 포장되고 주차장이 만들어져 관광객이 몰려오는 것이 좋은 것일까?
마차로 이십분이 안 되어 보이는 흙먼지가 나는 마을길을 오르니 풀도 없는 허허벌판에 군데군데 흙더미만 몇 개 있다. 이곳이 마이리크와트 고성이다. 고성을 알리는 안내표지석이 더 크게 보이는 이곳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 같다. 마을이름을 따서 마이리크와트 고성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호탄 왕국의 성터로 짐작하며 일본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되었다고 동행하고 있는 송 교수께서 한 설명이 전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가이드도 마을 어른도 잘 모르는 아직도 발굴중 이라고 하는 고성은 황량한 사막이 된지 오래다. 폐허가 된 성터에서 사진은 왜 찍지 못하게 하는지 모르겠고 이만큼 떨어져 슬그머니 한 장 찍어본다.
남아있는 흙더미로는 사찰 터인지, 잠자리인지, 창고였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황폐화된 이곳도 왕성이 만들어질 때는 곤륜산맥을 배경으로 물도 많고, 초원도 푸르고 사람들이 살만한 곳이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기후변화로 물이 마르고 초원이 사라져 사람들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자 사람은 떠나고 성벽만 남아 이곳이 한때 커다란 왕성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만일 물이 있고 초원이 살아있다면 왕성의 주인이야 누가 되었든 사람들은 살고 있었을 것이다. 자연환경 보존의 중요함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환경의 중요함을 다시 느끼는 곳이다. 한족들의 유적복원도 어려운데 이곳의 복원은 희망사항일 것 같다.
이 씁쓸함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버스에 오르려하자 성남친구가 예쁜 조약돌을 하나 건네준다. 탐방지의 조약돌을 주워 모으는 취미 아닌 취미를 설명하여 준 것을 잊지 않고 선물로 주고 있다. 폐허가 고성 터에서…….
호탄으로 다시 돌아와 엘라메라는 마을에 있는 요트칸 유적지를 찾아가고 있다. 포도덩굴로 된 터널 아래로 버스가 지나가며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포도덩굴 터널의 길이가 1400km가 넘는다고 하니 520km의 타클라마칸 사막의 세배쯤 되는 길이가 된다. 중국인들의 과장이 아닌가 싶고 집집마다 널려 있는 포도덩굴을 모두 모아보면 그렇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한동안 포도덩굴 가로수터널 길을 숨바꼭질하듯 요리 조리 빠져나가던 버스가 밭 한가운데 공터에다 사람들을 내려놓고는 이곳이 요트칸 유적지입니다 한다.
무엇이 유적지라는 것인지, 눈에 보이는 것은 살구나무와 호두나무 밭 사이로 민가가 보이고 작은 언덕 아래로 습지에서 자라는 줄과 잡초만 무성한 곳이다.
실크로드에 오기 전 자료를 찾아보니 마이리크와트 고성은 자료도 없고, 요트칸 유적은 다녀간 사람들마다 가이드들의 정확하지 않은 설명을 적어놓고 있어 이곳이 불교유적이라는 것 외에 정확한 기록은 없는 것 같다. 하수구를 파다가 나온 유물이 있어 발굴을 하니 대단한 내용이 담겨 있었지만 언젠가 체계적인 발굴이 필요하다 하여 다시 묻어 땅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 유적이다.
우리 가이드의 설명 또한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모르겠고 이야기를 요약하면 금으로 치장한 호탄의 불교사원이 있던 자리였다는 것이다. 이슬람과의 투쟁에서 밀려 불교가 쇠퇴하였고 그로 인하여 사원을 보존하기가 어려웠으며 청나라 때인가 한 사람이 금을 얻기 위해 곤륜산맥의 물줄기를 모아 사찰로 내려 보내면 물바다를 만들어 사찰은 무너지고 금부치만 남을 것이라는 생각에 물길을 사찰로 보내자 물과 흙이 너무 많이 흘러내려 모든 것이 묻혀버리고 말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결국은 인간의 욕심이 역사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수수께끼의 유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요트칸 유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요약되는 것 같다. 요트칸 유적은 호탄의 서쪽으로 10km 정도 지점에 있으며 기원전 60년 한나라에 복속한 유티안(yutian)왕국의 수도가 있던 곳으로 왕궁의 사찰로 불교의 중심지였다 한다. 유티안은 호탄의 옛 이름으로 3~8세기 무렵까지 번영을 누렸으며 인도의 불교와 관련된 동 불상, 불경, 오래된 동전, 서적 등이 다수 출토되었고 고대 폐르시아나 그리스의 영향도 받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유적이 지하에 매몰되어 있어 발굴이 필요한 곳이다. 출토되는 유물 중에 기독교와 관련된 동전과 십자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동서양 문화의 교류가 활발하였던 곳으로 보여 체계적인 발굴이 필요하다고 한다. 언젠가는 이곳도 발굴이 되어 관광객을 유치하는 장소로 인기가 있겠지만 시골변두리 지역의 호두나무가 많은 밭을 보여주는 썰렁함에 사람들은 실망을 하고 있다. 현재 호탄지역의 옛 왕성 터가 마이리크와트 고성지역이냐 요트칸 유적지 일대이냐 하는 문제가 있으나 아직 어느 쪽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는가 보다.
요트칸의 유적을 보며 종교가 무엇인지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요즘 서아시아 지역의 기독교와 이슬람과의 충돌을 보며 인간이라는 동물의 모순을 이곳에서 느껴 본다.
허망한 요트칸 유적을 살펴보고 있는데 주변 마을의 아이들이 우리들을 구경하고 있고 누군가 돈을 주자 아이들이 몰려든다. 요트칸 유적 부근에 살고 있는 아이들로 반은 신발을 신지 않은 모습이라 예전에 파키스탄지역 실크로드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따라가며 훈자왕국 주변 마을에서 만난 산아 제한이 없이 줄줄이 낳아 키우던 신발과 옷을 제대로 입고 있지 않았던 그 아이들 생각이 난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질병에 시달리고 있으나 맑은 눈동자의 훈자왕국 아이들을 이 마을에서 다시 보는 것 같다. 이곳 엘라메 마을의 아이들 역시 흙을 뒤집어 쓰고 우리를 향하여 그저 해맑은 얼굴로 웃어주고 있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여 사진 한 장 찍어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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