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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아름다운 풍경화희망의 날개 접긴 이르다
변광섭  |  news@ccdail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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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12.08  18: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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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아래 흔들리던 은빛 갈대도, 사각 사각 낙엽 밟는 소리에 애간장 태우던 계절도 저물어 가고 있다. 추수가 끝난 빈 밭에 우수수 찬비 휘날리고 눈발까지 하늘을 가로질러 가니 지금 우리는 겨울 초입의 풍경 앞에 서성거리고 있다. 어깨 부딪치며 고달프게 살아 온 한 해가 아쉽고 미련도 많겠지만 이제는 내 마음의 짐을 덜어내야 한다. 새로운 에너지와 꿈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잿빛 11월에서 순백의 12월로 넘어갈 즈음의 시골집에서는 대설이 오기 전에 김장을 해야 한다며 통김치와 총각김치, 그리고 물김치까지 담느라 지난 며칠 부산했다. 김치를 사 먹는 가정이 제아무리 늘었다 한들 김장은 여전히 고된 연중행사이며 동시에 유쾌한 이벤트다. 한 해를 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성스러운 축제이기도 한 것이다. 어머니는 시집 간 딸과 며느리 몫까지 해야 한다며 속이 꽉 찬 배추와 무를 뽑아 잘 씻고 갖은양념을 준비했다. 파 마늘 고추 등 무채 소를 만드는 양념거리 모두 뒷밭에서 힘겹게 농사 진 것들이니 웰빙식이 따로 없다. 당신의 손맛이 웰빙이고 웰니스며 그린스타일인 것이다.

지금은 추억속의 풍경화에 불과하지만 김장 담그는 일이 끝나면 시골에서는 동짓날 준비를 해야 했다. 설, 한식, 단오, 추석과 함께 5대 명절이라며 조상께 차례를 지내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갖가지 놀이를 즐겼는데 팥죽을 끓여먹고 달력을 만들어 나눠 가졌으며 버선을 선물하기까지 했다. 하늘과 땅과 인간이 근본이라는 동지의 철학이자 우리 조상들의 지혜였던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마을 아낙네들이 옹기종기 모여 김장을 담그고 김장독을 파묻는 풍경이 사라지고 있다. 동짓날의 아름답고 정겹던 풍습도 연기처럼 떠나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새해가 오기 전에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각오로 준비하려는 지혜의 산물이 온데간데없이 이따금 꿈결 속에서나 만날 수 있으니 서글픈 세월과 인생무상을 탓하면 무엇하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인간의 마음속에 따뜻한 온기가 남아다는 사실이다. 여기저기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김장 담그기가 한창이고 연탄을 배달해 주는 아름다운 손길도 있다. 오직 자신들만을 위해 먹고 놀며 즐기던 예전의 송년회와는 달리 이웃들과 함께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기도 한다. 박물관 미술관에서는 다문화 가정과 소외계층을 초청해 유익하고 추억 만점의 문화이벤트를 전개하기도 한다. 무미건조하고 인간미라곤 눈꼽만큼도 없던 연말 풍경이 조금씩 서정과 낭만, 아름다움과 따스함으로 되돌아가고 있으니 아직 희망의 날개를 접기엔 이르다. 나도 그 대열에 서서 검은 분칠을 하고 싶다. 손에 손잡고 사랑을 노래하고 싶다. 혼자 행복한 것은 행복이 아니다. 자만이고 욕심이며 이기심이다. 함께 행복해야 진짜 행복한 것이다. 수확이 끝난 빈 밭에 누군가를 위해 몇 줌의 고구마와 감자를 남겨두던 아름답던 서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날짐승을 위해 붉은 홍시나 과일 몇 알 남겨두고 그것이 얼든 말든, 임자 찾아가든 말든, 마음 비우고 자연을 섬기고 수많은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 조상의 그 후손들이니 우리에게는 아직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 함께 사랑하며 나누는 아름다운 유전인자를 간직하고 있다.

2009년 한 해도 저물어 가고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그간의 삶을 되돌아보자. 내 몫도 모자라 옆집까지 넘보는 황량한 삶이 아니었는지, 속도의 시대 혹여 뒤질세라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유치한 일들 다 하려 하지 않았는지, 다람쥐 도토리 감추듯 저 혼자 즐기고 행복하려는 얄팍한 마음에 상처입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생각하면 부끄러울 뿐이다.

이제 몇 푼 되지 않는 내 몫마저 나눠주고 더불어 함께 사랑하는 연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욕망과 이기의 때를 벗고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며 신뢰하는, 그리하여 이 땅은 살만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면 더욱 좋겠다. 다시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마음의 구들장을 따뜻하게 데우고 싶다.

▲ 변광섭
청주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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