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 상춘정
정지용 시인, 육영수 여사, 준봉 조헌 등 시대의 역사 속 인물들이 유난히 많은 옥천은 기념축제와 각종문화유적 등이 풍부한 지역으로 문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정지용 백일장'의 경우 전국적으로 문인들이 첫 등단하는 곳으로 이용할 정도로 유서가 깊다.이처럼 각종 문화유산 등이 풍부한 옥천군을 집중 조명해본다./편집자주

▲ 청석교
◇정지용·육영수·조헌 생가와 생활 터전 조명
시 '향수'로 유명한 정지용은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고 대상을 선명히 묘사해 한국 현대시의 신경지를 열었던 시인이다. '이상'을 등단시키고 조지훈·박목월 등과 같은 청록파 시인들을 육성하기도 했다. 1902년 5월15일 옥천군 구읍에서 출생한 정지용은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모교 교사, 8·15광복 후 이화여자전문 교수와 경향신문사 편집국장을 지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순수 시인이었으나, 광복 후 좌익 문학단체에 관계하다가 전향해 보도연맹에 가입했며, 6·25전쟁 때 북한으로 끌려간 뒤 사망했다. 시인이라면 딱딱한 이미지와 무뚝뚝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편견이 있지만 정지용은 구읍이라는 동네에서 낚시를 하며 풍유를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지당'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 중봉 조헌 선생이 후학을 교육하던 서당이며 군북면 이백리에 있다. 처음에는 각신동이라는 마을 앞에 있어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고 했으나 이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시전(詩傳)에 있는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수 없다'(高山仰止, 景行行止)는 문구에서 끝의 '止'자를 따 이지당이라고 했다.그 후 퇴락됐으나 1901년 옥천읍 옥각리의 금(琴)씨, 이(李)씨, 조(趙)씨, 안(安)씨 네 문중에서 재건해 오늘에 이른다. 건
▲ 청풍정
물 구조는 목조기와 집으로 정면 7칸, 측면 1칸의 팔작집으로 이 곳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친필로 쓴 '二止堂'이라는 편액과 중봉 조헌 선생의 친필 '覺新書堂' 현판이 걸려 있다. 육영수 여사 생가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1925년 11월29일에 태어난 곳이다. 현재 건물은 없지만 1600년대 김정승 이후 송정승과 민정승이 거주해 삼정승의 집으로 불리던 가옥을 육영수 여사의 부친 육종관씨가 민정승의 자손 민대감으로부터 1920년 매입했다고 한다. 6047㎡의 대지 위에 1970년 초에 개축된 관리사와 사당 등만 남아 있으며, 주변은 울창한 산림이 형성돼 있고 본채·사랑채·별당 등 10여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터만 남아 있으며 주변은 연못과 정원으로 이뤄져 있다. 건물 배치는 대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사랑채 터가 있고 그 뒤에 안채 터가 있으며, 청기와 지붕의 사당과 별당 터가 있다. 주위에는 관리인과 고용인들이 기거하던 부속 건물이 있으며 사랑채 터 동쪽에는 연못이 있다. 육영수 여사는 옥천 지방의 독농가(篤農家) 육종관의 2녀로 출생했으며, 이름있는 문벌이었고 우리나라 전통적인 부덕(婦德)을 갖춘 현대 여성이었다. 특히 불우한 사람을 위해 봉사와 희생으로 일관된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74년 8월15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29회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해 8월19일 국민장으로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1600년대 김정승 이후 정승들이 살던 곳으로 조선시대 상류 계급의 전형적인 양식의 건축구조를 갖추고 있었던 곳이며, 육영수 여사가 태어난 곳으로 가치있는 자료로 지난 2004년부터 복원 공사중이다.

▲ 청마리제신탑
◇각종 문화비 등 유산
죽향리 사지삼층석탑(竹香里寺址三層石塔)은 죽향리 탑선골의 절터에 있던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죽향초등학교 교정으로 이전됐다. 소형 석탑이지만 단층의 기단부 위에 3층의 탑신부와 복발(覆鉢)·보주(寶珠)로 이뤄진 상륜부(相輪部)를 갖추고 있어 거의 완형에 가깝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조성됐는데 우주와 탱주가 표현됐을 뿐 다른 장식은 없고, 기단갑석(基壇甲石) 윗면에는 1단의 돌출부를 둬 탑신부를 받치도록 했다. 1층의 몸돌에는 각 면마다 우주(隅柱)를 모각했고 전면에는 문비(門扉)를 음각으로 표현했다. 탑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매우 마르고 길쭉한 모습으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크기는 전체높이 291㎝ 기단폭 92㎝이다. 이 삼층석탑은 100년이 넘은 석탑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51호 등록돼 있다. 소재지는 옥천읍 문정리 83번지다.
옥주사마소(沃州司馬所)는 조선시대 지방 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으로 옥천지방에 속한 사마소다.조선 효종 5년(1654)에 세워진 것으로, 우암 송시열이 쓴 '의창중수'에 따르면 이 건물은 원래 어려운 백성을 위해 곡식을 저장해 두던 의창건물을 뜯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규모는 앞면 5칸, 옆면 2칸이고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 지붕의 건물이다. 앞면 4칸에 툇마루를 두고, 그 뒤로 오른쪽에는 마루, 왼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뒀다. 내부에는 관성사마안, 향약계안, 옥천군향계규약 등 조선시대 문인들의 면모를 알려주는 여러 편의 문서가 있다. 이 사마소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57호로 등록돼 있으며 옥천읍 상계리 57-2번지에 위치해 있다.
용촌곽은재실 (龍村郭垠齋室) 건물은 담양부사와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낸 조선 성종 때 문신 곽은 선생의 재실(齋室)이다.선생의 사망(1491년) 이후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며, 고종 20년(1894)에 중수됐고, 1978년 수해 후 복구됐다.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팔작집으로 평면은 동측으로부터 건넌방, 대청, 온돌방, 부엌으로 구성돼 있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뒀으며, 동측 온돌방 앞에는 누마루를 두고 별도의 아궁이를 설치했다. 건물 구조는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전면으로는 원기둥을 세우고 벽체부는 네모기둥을 세워 납도리집으로 구성됐다.가구 형식은 5량가(五梁架)이며, 대청마루와 툇마루 청판(廳板)에는 조선시대의 고식(古式) 치목기법이 나타나 있다. 큰 규모가 아니면서도 중후하게 느껴지는 이 재실은 제사를 위해 사용됨과 동시에 조용하게 정진(精進)하는 장소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재실은 유형문화재 제243호로 이원면 강청리 산17-1번지에 자리하고 잇다.

▲ 김문기 유허비
◇충무공 등 인물 탐구
충의공 김문기 유허비(忠毅公 金文起 遺墟碑)는 김문기(1399~1456) 선생이 살았던 곳을 알리기 위해 정조14년(1790년)에 세운 것이다. 선생의 호는 백촌(白村)이며 본관은 금령이다.조선시대 문신 김관의 아들로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해 부친상을 당했을 때 2년 시묘를 했고, 모친상을 당하고도 그 예를 다했다. 이런 효성이 알려져 그가 살던 마을은 지금까지 효자동이라고 불려진다.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던 그는 문무를 겸비해 1430년(세종 12년) 예문관 검열이 됐으며, 1436년(세종 18년)에는 사간원 좌헌납, 이듬 해에는 병조정랑, 1450년에 병조참의,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1455년(세조 1년) 공조판서에 임명됐다. 세조2년에 박팽년과 성삼문등 단종 복위를 모의했으나 검거돼 모진 고문 끝에 순절했다. 그의 9대손 김정구의 소원으로 신원됐고, 정조 2년(1778년)에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됐다. 이 비는 1786년 정조 10년에 사헌부 대사헌 홍직필이 짓고 유최기가 글씨를 썼다. 비는 조선시대 전형적인 비석으로 지붕 모양의 비갓을 올려놓았고, 비 전면에는 '유명조선국 이조판서 증 의정부 좌찬성 익 충의김공 휘문기유허비(有名朝鮮國 吏曹判書 贈 議政府 左贊成 謚 忠毅金公 諱文起遺墟碑)'라고 각자돼 있다. 후면에는 선생의 행적이 소개돼 있다. 이 비는 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됐으며 이원면 백지리 841-1번지에 위치해 있다.
'사서공전식 영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사서공 전식(1563∼1642년) 선생의 초상화다. 전식은 선조 22년(158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해 많은 공을 세웠다. 선조 36년(1603년) 문과에 급제해 전적·예조좌랑을 거쳐 울산판관과 전라도도사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으며, 이후 대사간·대사헌 등 여러 벼슬에 올랐다.선생의 초상화는 모시바탕에 그려 비단으로 배접한 가로 92㎝, 세로 136㎝ 크기의 족자로 오른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은 전신상이다. 관모를 쓰고 문관의 제복을 입었으며 두 손은 소매 안에서 마주잡고 있다. 원래는 모시바탕에 먹만 칠했는데 후에 다시 색을 입히고 얼굴과 가슴 부분에 색을 더햇다. 가슴 부위에는 연꽃과 부엉이를 수 놓았는데 당시의 자수풍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비록 그림의 상태는 많이 손상됐지만 19세기 초의 전형적인 초상화로 매우 가치있는 작품이다. 매년 후손들이 영정을 모신 목담영당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옥천=박승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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