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인순
도림평생교육원 원장
문에 기대어 빈방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오래된 탁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문간방을 보는 것이 요즘의 행복이다. 그림처럼 고요하다. 코스모스길이 그려진 수채화 블라인드에서 밝은 노랑 빛이 방안으로 쏟아진다. 빨려 들어가듯이 방안에 들어가 탁자 앞에 앉는다. 색이 바란 벽지는 먼 곳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이십 년 동안 이 방이 갖고 있던 풍경을 되새긴다

처음 입주 했을 때 관리비라도 보태 쓰려고 근처 의과 대학생에게 방을 내 주었다. 단독주택에서는 전구 촉수를 줄이거나 허드렛물 모아 놓았다가 화초에 물주고 변기 물통에 벽돌하나 집어넣는 것으로 손끝에서 얼마간의 돈이 절약될 수 있었다.겨울에 입주했는데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지내다 한 달 관리비가 한겨울 연탄 값만큼 나왔다. 도로 단독주택으로 갈 수도 없는 일, 문간방을 세주는 일로 예측하지 못한 지출을 막았다.

맞벌이를 시작해서 품위유지비를 충당했다. 자동차를 사고, 안방에서 책상 세 개를 놓고 지내던 삼형제 중 큰아이를 문간방으로 독립시켰다. 방문을 잠그고 있는 걸로 큰아이의 오랜 소망이 제 방 온전히 갖는 것이었다는 걸 알았다. 큰아이가 대학에 입학해서 서울로 제 짐을 싸서 나가고, 둘째가 이 방에 들었다가 그 애 역시 이 방을 떠났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셋째까지 집을 떠나자 문간방은 아이들 허드레 짐을 쌓아 놓는 방이 되었다.

그러다가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던 소녀 적의 소망이 떠올라 문간방을 꾸몄다. 책꽂이도 새로 사고 오디오도 들여 놓고 천장에 별도 달아 놓고 '꿈꾸는 방'이라는 이름도 붙였다. 나 또한 문을 닫고 나만의 공간에서 내 은밀한 상상으로 혼자 뒹굴뒹굴했다. 책장이 늘어나고 옷걸이가 늘어나 얼마 안가서 서재와 드레스 룸이 필요하게 되었다. 다섯 식구가 한방에서 살던 때도 있었건만 사람 대신 가구가 온통 방을 차지하면서 둘이 써도 아파트 공간이 부족하게 되었다.

년 초에 일주일간 몹시 앓았다. 이러다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왜 장롱속이랑 싱크대 속이 궁금했는지 모를 일이다. 실컷 앓고 나서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집안을 둘러보았다. 어느 방이고 발 들여 놓을 데가 없이 물건이 쌓여 있었다. 노인들의 주거 공간을 가보면 필요 없는 물건들까지 온통 쌓여 있는 경우가 참 많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것일까. 버리기 아까워 쌓아놓은 가재도구가 어지러웠다.

큰 아주버님이 생각났다. 평생을 치열하게 일 중독자처럼 살아오신 분이다. 물론 성공을 했다. 그런데 아주버님 댁이 빈집처럼 깔끔해졌다. 돌아가신 형님 사진이랑 잠옷까지 옷걸이에 걸려있었고 주방에는 형님이 아끼던 고급도자기 식기가 가지런하던 집이었다. 죽음을 생각하며 스스로 버려야겠다고 생각하셨단다. 새롭게 물건을 사는 일을 삼가고 아끼던 것들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다른 이들에게 줄 수 없는 물건이 있더란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있는 상패나 트로피는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물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상패는 자녀나 부모님을 만나는 시간을 미루고 30년 전에 자신을 떠난 아내와의 시간조차 반납한 오랜 세월의 대가였는데도 말이다.

한 달 내내 집에만 들어가면 보따리를 쌌다. 묵은 물건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냉장고도 싱크대 속도 비우고 치웠다. '내일 치울 거야' 라고 했다가 내일이 오지 않으면 안주인 살림솜씨 흉 볼 거라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보태며 몇 달을 보냈다.

그리고 방 하나가 완전히 비워졌다. '꿈꾸는 방'이었던 문간방이 '생각하는 방'으로 바뀌었다. 사각의 방에 오로지 사방탁자 하나만 두었다. 그 위에 책 한권 하고. 빈 방에 앉아서 빈 벽을 바라보며 생각을 한다. 비워 놓으니 생각이 차오른다. 날아갈 것 같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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