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흥덕구 쪽의 어느 아파트 근처에 갔다가 그만 살풍경스런 모습을 보고 말았다. 단지를 둘러싸고 온갖 현수막이 울긋불긋 걸려 있는 것이 언뜻 보아 무슨 투쟁 장소인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내용인즉 입주민들이 건설사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중으로, 어떤 것은 매우 충격적(?)인 표현도 담고 있어 오히려 내가 머쓱해지고 말았다. 내용의 전말이나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신흥 주거지로서 선망어린 단지로 떠오르는 고급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수상쩍은 풍경이 왜 그리도 낯설게 느껴지던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올해 말이면 꼭 20년이 된다. 입주 초부터 거기서 살았으니 그 동네에서 나 같은 이는 '원주민'에 속한다. 일종의 터줏대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참 고약하기 짝이 없다.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주변머리 없는 무능한 사람이라는 표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도 한 것이발 빠른 사람들은 일찌감치 전도유망한 신흥단지로 갈아탔거나, 평수라도 늘려 바로 앞 동의 큰 아파트로 옮긴 이 많으니까 말이다. 세상 돌아가는 것 모르고 주인 타령하다가 아예 터전을 잃고만 적잖은 사례에서 '원주민'이란 이미 과거를 의미하는 아이콘일 뿐 그게 무슨 훈장이 되랴.

사실 사는 것 한 가지만 놓고 본다면 도무지 불편한 것을 모르겠다. 아직 아이가 어려 좋은 학군을 쫓아간다거나, 출퇴근하는데 너무 치우쳐 있다거나, 재산 가치라는 측면에서 어디 새로운 호재를 겨누고 있다면야 모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아내가 이재에 어두운 못난 사내를 너그럽게 보아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버티고 살 수 있었을까. 그런 면에서 나는 행운아이다. 20년 세월동안 익숙해져 눈을 감아도 구석구석이 훤한 우리 아파트, 세월의 깊이만큼이나 우거진 수목들은 그런 나에게 힘을 실어주는 넉넉한 친구이기도 하다.

굳이 따지면 왜 불편한 게 없을까. 고층아파트 붐을 타고 초기에 지어진 아파트라서 지하주차장이 없다. 이로 인한 주차난은 우리 아파트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다. 간혹 주민 간에 분쟁이 일어나는 것도 주차문제로 인한 시비가 대부분이다. 좁은 공간에 이중 삼중으로 차가 엉켜있으니 생각해 보라. 한여름 소나기가 내리거나, 한겨울 눈이 쌓였을 때 여러 대의 차를 밀어야하는 경우를. 은근히 부아가 치밀기도 하거니와 트럭이나 대형차 등 몸집이 큰 차가 가로막고 있을 때, 인내심은 극에 달한다. 그래도 지금까지 잘 참고 살아왔다. 그 불편을 알기에 남의 차를 가로막는 얌체 주차는 피하면서.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나의 아파트 생활을 소개하자는 게 아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른 풍속도를 보며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보자는 것, 그런 넋두리를 하고 싶은 것이다. 물질적 풍요가 준 열매가 달디 달다지만 고유하게 지켜온 공동체의 미덕은 또 얼마나 손상되었는지. 저기 이웃 아파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갈등도 따지고 보면 그런 연장선상에 있는 것, 우리도 모르는 사이 경제적 가치가 최고의 선이 되어 서로에게 아픔을 주는 상처로 작용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부디 슬기로움을 발휘하여 이 여름, 모두가 승리하는 승전보를 전해 준다면 한 줄기 소나기보다도 더 시원하지 않을까.

▲ 김홍성 청주ymca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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