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나무 재배 · 조지소 설치 등 제지술 발전 노력


▲ 조선왕조실록.
고려를 이은 조선시대에도 이전과 같이 제지업을 무척 중요시해여러 곳에 닥나무 밭을 만들게 하고 닥나무 재배를 시켰다. 그리고 세종 때에는 사람을 대마도에 보내어 일본 닥나무를 수입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일본 닥이 우리의 기후와 토질에 맞지 않아 거의 자라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에 제지공을 파견해 제지술을 배워오도록 하여 국내 제지술 발전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시대에 종이를 관장하는 관청으로 맨 먼저 설치된 것은 태종 15년에 만들어진 조지소(造紙所)였다. 이것은 한때 폐지되었다가 세종 2년에 다시 조지소를 설치하여 관공서에서 필요한 종이를 조달했다. 세조 11년에 조지서(造紙署)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것은 조선 후기 고종 19년까지 존속했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는 종이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나라에서는 사찰에서도 종이를 만들어서 바치도록 했다.

조선시대에 화폐대신 모시, 삼베, 무명과 같은 물물거래가 많이 이뤄졌는데 1401년 하윤(河崙)에게 명하여 저화(楮貨)를 만들도록 했다.

1403년에는 주자소(鑄字所)를 두고 활자를 만들어 인쇄용 종이가 많이 필요하여 조지서를 두어 각 지방에서 많은 종이를 공납 받았다. 닥나무가 모자라 조지서에서는 댓잎, 볏짚, 솔잎, 버들, 귀리짚, 뽕나무껍질, 소나무껍질, 이끼, 삼, 베, 어망, 부들 등과 같은 것을 섞어 잡초지(雜草紙)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한지관련 유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조선시대에 간행 된 금속활자본, 목활자본의 대다수가 닥나무로 만든 닥종이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종이제조 기술을 알 수 있는 국내외의 기록이 전하는데, 외국문헌으로 중국 명나라의 도융(屠隆)이 지은 '고반여사(考槃餘事)', 명나라 송응성의 '천공개물(天工開物)', 청나라의 당병균(唐秉鈞)이 지은 '문방사고도설(文房肆攷圖說)'과 우리의 문헌으로 조선시대 이규경(李圭景)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들 수 있다.

먼저, '고반여사(考槃餘事)'에는 '고려지는 누에고치로 만들어서 비단같이 희고 질기고, 글을 쓰면 먹이 잘 먹어 좋으며, 이것은 중국에 없는 것으로 진품이다'라고 한 대목에서 한지재료로 닥나무에 누에고치를 섞어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공개물(天工開物)' 중권(中卷) 권 13 살청조(殺靑條)의 조피지(造皮紙)에서는 '조선의 백추지(白紙)는 어떤 지료(紙料)로 만든 것인지 모르겠다'고 종이 제조의 기술적 입장에서 그 지품(紙品)의 우수성에 대하여 의문을 던진 기록도 보인다.

또한 청나라 건륭황제(乾隆皇帝) 43년(1778년) 때의 '문방사고도설(文房肆攷圖說)'에 '진나라 왕희지의 서란정 서문에 누에고치로 만든 종이를 중국에서 썼는데 이것이 바로 고려 종이이다(晋王羲之書蘭亭序 用蠶作紙 今都中所用高麗紙)'라는 기록에서 고려와 조선의 종이가 매우 뛰어났음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 정조때 이규경(李圭景)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고려의 종이는 천하에 이름을 떨쳤는데, 그것은 다른 원료를 쓰지 않고, 닥나무만을 썼기 때문이다. 그 종이가 하도 부드럽고 질기며 두꺼워서 중국 사람들은 고치종이라고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종이의 원료로 닥나무를 사용하고, 종이의 질이 우수하여 국내외로 이름을 떨쳤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우리 고유 한지의 우수성이 이미 이전부터 선조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됐던 것이다.

▲ 윤용현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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