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한 번 밖에 갖지 못하는 인생을 산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을 그저 무심할 정도로 각자의 생활에 얶메여 살고 있는 세월의 나그네일 뿐이다. 만약에 그 인생에서 일말의 실패라도 한다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의미 없는 생명의 연속일 따름이다. 부도덕한 여교사의 성 개념과 모 재벌회장의 어긋난 부성애, 그리고 약자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기 자신의 배만 불리는 재벌들과 정치인들의 비자금 조성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만약에 우리가 이러한 시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문학적인 호기심으로 우리 주변을 한번 살펴본다면, 소위 명작이라고 일컫는 작품들에서 읽었던 주인공들과 흡사한 많은 인물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스탕달이 '1830년 연대기'라는 부제 하에 발표한 작품 「적과 흑」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비열한 삶의 목표와 출세를 위해 인생을 도박이라고 여기는 주인공 쥘리앵 소렐을 통해서 그의 생애가 의미하는 내용을 1830년대를 살았던 한 특정한 프랑스인의 갈등과 당시 사회의 환경적인 양상을 그린 작품인데, 이와 같은 쥘리앵 소렐을 우리나라 현실에 불러들여 그 변모를 관찰한다면 분명히 흥미 있는 문제거리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사회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는 수많은 쥘리앵 소렐들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야욕들과 탐닉을 통해서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는 것에 시각을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적인 지위와 재산 그리고 권력을 소유하고 정복하기 위해서 지나친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남이야 어떻게 되든 간에 그들에게 맞지 허울을 입고 행동하며 그것에서 얻어질 결과물들에 대한 야심들로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작품처럼 적이 되느냐 흑이 되느냐? 에 대한 정연한 흑백논리의 질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우리의 쥘리앵 소렐들은 자기편의 적으로 이곳저곳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인생을 걸고 열화같이 치솟는 정렬을 불태운다. 마치 치열한 의욕을 지니고서 본연의 인간성을 상실한 체 갈구하는 것들이 끝없이 많은 욕심 많은 가난한 마음들처럼…….

적과 흑은 우리의 쥘리앵 소렐들에게는 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엄청난 승부처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들이 삶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무슨짓을 할 것인가? 에 대해서는 그들과 주변을 함께하는 우리로써는 무모한 입신양명의 수법을 가늠해 보는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1830년대의 프랑스 사회보다는 훨씬 더 활동하기 좋은 다양한 환경이다. 우리의 쥘리앵 소렐들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정치를 하든 아니면 기업이나 금융계의 종사하든 어떠한 경우에도 강력한 의욕과 뛰어난 재주로 모든 궁리를 다해서 자신이 목표로 하는 출세가도로 매진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게도 그들이 온 힘을 다해 추구하는 도박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우리사회의 쥘리앵 소렐들에 있어서 그들의 사상이나 행적들을 윤리적인 척도로 논할 필요성은 없다. 오히려 그들 개개인의 인간성과 그들이 살아가려고 주력하는 사회 환경에 관련된 것들을 논할 필요성이 있다.

심리학적으로 인생을 도박에 걸고 혼돈된 사회에 도전하는 인간들은 행복과 불행, 부유함과 가난함, 관심과 무관심, 그리고 따뜻한 인간성과 냉혹함을 구분할 여력도 없이 지독할 정도로 잔인한 자신들의 목표에만 관심을 둔다. 따라서 우리의 쥘리앵 소렐들은 작품속의 가난하고 격정된 청년 쥘리앵 소렐의 욕망처럼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승산을 겨냥하고 불사신처럼 날 뛸 것이다. 부동산 투기를 할지도 모르며 합법적인 사기극으로 부를 축척하여 타인을 괄시하면서 그들의 위에서 군림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비열한 야심가들 쥘리앵 소렐들은 또한 그들이 시도하는 승부에 의연하게 대처하려고 거짓을 행할 것이며 비굴한 모습도 선량함으로 포장할 것이다. 설령 그들이 인생을 청산하는 경우에도 도도할 정도로 거짓을 대처할 것이다.

만약에 스탕달이 다시 살아 돌아와 우리사회의 쥘리앵 소렐들을 재구성해 본다면, 현재 진행형이라는 시점에서 선발되는 모델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며 환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불쌍한 인간이 될 것이다.

▲ 박기태 건양대 교수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