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고기를 푹 고아낸 국물에 밥을 훌훌 말아넣어서민의 한 끼 배를 든든히 채워주던 국밥.

23일 정동 제일화재 세실극장에서 개막한 극단 자유의 '국밥'(김정 작·김정옥 연출)은 한 그릇 국밥 같은 연극이다.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온 몸으로 겪은 욕쟁이 할머니 떡수니의 희로애락을 커다란 솥에 한 데 섞어 펄펄 끓인 뒤 관객에게 내놓는다.

판소리와 힙합, 전라도 사투리로 표현한 구수한 욕지거리가 양념처럼 더해진 국밥을 후후 불며 먹노라면 모진 현대사의 흐름에 떼밀려 거칠게 살아온 우리 주변의 낯익은 '떡수니들'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막이 오르면 커다란 솥이 자리 잡은 무대 위로 남장을 한 국악인 신영희가 걸쭉한 욕설과 창으로 분위기를 띄우면서 극의 시작을 알린다.

그러면 객석 뒤편에서 국밥집 주인공 떡수니가 '아리아리랑~쓰리 쓰리랑~' 구성진 가락을 부르며 모습을 드러낸다.

질펀한 음담패설과 걸쭉한 육두 문자를 창에 실어 주거니 받거니하며 극 도입부를 장식하는 두 사람을 보며 객석에서는 한바탕 웃음이 번진다.

이 때 힙합 보이 '긴가민가'가 등장해 두 사람 사이를 휘저으며 숨가쁜 랩을 선사한다. "뭐라고 씨부렁 거리는 지 하나도 모르겄네"라고 불평하면서도 나름대로 힙합을 따라하는 떡수니와 신영희 모습에 웃음 소리는 더 커진다.

곧이어 무대가 어두워지며 6.25 전쟁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당한 10.26 사건까지 한국 현대사를 압축해 보여주는 흑백 영상이 '어제는 그랬었지'라는 힙합 노래와 어우러지며 상영된다.

다시 무대가 환해지면 떡수니가 자신의 인생 유전을 담은 독백을 조근조근 털어놓으며 극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월남 전쟁에 참전한 첫 사랑 삼봉 오빠가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재봉틀, 카시미롱 이불을 장만해 돌아오면 가정을 이뤄 알콩달콩 살아가는 것이 꿈이었던 열 일곱 처녀 김덕순.

하지만 당시 시골 처녀 대부분이 그러했듯 돈벌이를 위해 서울로 상경한 덕순의꿈은 몸을 빼앗긴 뒤 식모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며 하루 아침에 산산조각 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공순이, 미군 현지처, 다방 마담을 전전한 뒤 마음을 다잡고 국밥집을 차린 그는 피땀 흘려 국밥집을 번듯하게 일궈낸다.

순진했던 처녀는 이제 험한 욕을 쓰는 욕쟁이 할머니 떡수니로 변했지만 첫 사랑의 추억을 가슴에 간직한 채 마음 속의 응어리를 먹음직스러운 국밥과 해학적인 욕설로 승화시켜 손님들을 즐겁게한다.

떡수니 역을 맡은 극단 자유의 중진 배우 손봉숙이 탄탄한 연기력으로 안정감 있는 연기를 선보이긴 했지만 5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산전수전 다 겪은 할머니 역할을 맡기에는 사실감이 다소 떨어져 보인 것은 아쉬운 점.

김정옥 연출은 "공연 초반이라 아직 다듬을 게 많다"면서 "1시간 10분인 극의 분량도 앞으로 5-10분 가량 늘려 완성도를 높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내달 11일부터는 탤런트 강부자가 손봉숙에게 바통을 이어받아 주인공 떡수니를연기한다.

ykhyun1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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