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하며 많은 살림을 버렸다. 하지만 애지중지 여겨 챙겨 온 물건이 있으니. 초등학교 3학년 어느 가을날 어머니가 어렵사리 구해준 낡은 우표첩이 그것이다. 어머닌 우표 수집을 취미로 삼으라고 내게 권했었다. 그 당시 잦은 바람기로 가정을 등진 아버지가 가끔씩 보내오는 편지를 읽곤 어머닌 어김없이 겉봉투에서 우표를 조심스레 떼어 내게 건네주기도 하였다.

수십 년 세월을 용케 견딘 낡은 우표첩 속엔 형형색색의 우표들이 연대별로 수집돼 있다. 1966년 10월 15일 '서울 대학교 개교 20주년 기념.' 이라는 우표도 있다. 1967년 3월 2일이라고 쓰인 우표 속엔 故박정희 대통령과 머리가 허연 독일 뤼브케 대통령의 모습도 보인 다. 우표 하단엔 '독일 뤼브케 대통령 내방 기념'이라고 쓰여 있다. 또한 1967년 4월 28일이라고 쓰인 우표엔 '캐나다 세계 박람회 기념'이란 문구도 눈길을 끈다. 1968년에 발행된 우표 속엔 다섯 명의 싸이클 선수가 자전거를 타는 그림과 '제 19회 올림픽 대회 기념'이라는 문구가 인쇄돼 있다. 최근 것으론 백남준의 예술세계 기념우표, 한국 말레시아 수교 50주년 기념우표 등이 있다. 지난 45년 동안 일어난 일들을 요즘도 한 눈에 알 수 있음은 아마도 년도 별로 수집한 각종 우표 덕분이리라. 개중엔 친구, 친척, 아버지, 연애편지 속 주인공들이 보내온 편지 겉봉에서 떼어낸 우체국 소인이 찍힌 우표가 다수이다. 한편 직접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구입한 것도 많다.

요즘은 손 전화 및 인터넷의 발달로 파란색 잉크에 펜을 찍어 고운 편지지에 정성껏 편지를 쓰던 일이 옛이야기처럼 들린다. 나의 젊은 날엔 주로 편지로 타인과 소통 했었다. 특히 연애편지 쓰는 일에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길게 쓴 편지는 편지지 열 두 장이 고작이다. 그런 반면 어느 남학생은 원고지 30매 분량의 연애편지를 내게 사흘이 멀다않고 등기 우편으로 보냈었다. 이렇게 흰 눈이 내리는 날에는 그 때 그 남학생이 분홍색 편지지에 곱게 써준 김광균의 '설야'라는 시를 입속으로 가만가만 암송하곤 한다.

어디 이뿐이랴. 짝사랑의 신열을 주체 못해 흰백지에 고백한다는 얼굴도 모르는 어느 남학생의 애끓는 편지 구절구절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학교 등굣길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나를 매일 훔쳐본다는 남학생이었다. 심지어 날마다 나의 행동을 먼발치서 지켜본 후 그것을 구체적으로 만화로 묘사해 편지를 보내기도 했었다. 그동안 나의 우표첩에 고이 모셔진(?) 물기 잃은 바짝 마른 네잎 클로버, 빨간 단풍잎을 편지 갈피에 넣어 장문의 편지를 보내줬던 그 남학생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할까? 갑작스레 안부가 궁금하다.

여자는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던가. 젊은 날의 아름답던 추억들이 응축된 천 여 장의 우표들을 바라볼 때마다 지난날의 편지 속 주인공 얼굴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그 탓인지 나의 낡은 우표첩의 많은 우표들이 마치 옛 추억의 화석처럼 느껴진다.

/김혜식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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