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에] 박기태 건양대 교수 

요 근래에 기상이변이 심화되고 있다. 올 여름 유례없던 장마는 우리를 가혹하게 괴롭혔으며 그것과 함께 쏟아 부은 폭염은 지상의 만물들을 지쳐 쓰러지게 만들었다. 그런 까닭에 시원한 바람과 청명한 하늘을 가져다 줄 가을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은 우리의 작은 소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혼탁함속에서도 우리는 시계의 초침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인생을 살아야 하며 그 순간에도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과 더불어 자기 자신의 빛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얼마나 가상스러운가! 하지만 그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마음은 허무해지기 마련이다. 자신을 밝게 하고 주위를 밝히는 힘을 가지고자 하는 꿈이 간절할 텐데, 살아가면서 허무와 좌절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진정 몇 사람이나 될까?

때때로 우리를 허무에 빠뜨리고 좌절시키는 것은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어둠이다. 그 어둠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며 뿌리조차 뽑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만든다.

허무와 절망에 허우적거리며 내가 나로서만은 정녕 빛이 될 수 없다는 상심에 젖어있던 어느 날 내 어둠을 극복할 수 있는 등불 같은 한편의 시를 만났다. 그것은 바로 38세에 아깝게 요절한 러시아의 시인 푸쉬킨이 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마라 /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 마음은 미래에 있다 / 현재는 우울한 것 / 모든 것은 순식간에 / 지나가 버리니 지나가 버린 것은 / 그리운 것이 되리라.”

내가 빛이 아니어도 푸쉬킨은 나에게 내 자신만은 밝힐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만 같았다. 다시 말해서, 외롭고 괴로운 슬픈 현재를 견디라고 읊조리면서 희망의 삶은 올 것이니 기대하라고 속삭여주었고 삶이란 속고 또 속으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이 시가 나를 설레이게 하는 것은 시가 내포하고 있는 구체성과 현실성은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어서 내 가슴 속에 오래도록 심어져 있는 것 같다.

어쩌다 나는 내 삶의 중심에서 훌쩍 벗어나 타인의 관점으로 나를 바라보고 싶은 때가 가끔씩 있다. 높은 산언저리에서 신의 눈을 닮는 시선으로 나를 제대로 흘러가는 삶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으면 하는 황당한 생각을 해본다. 그러면서 나름의 고즈넉한 시간을 빌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영혼의 기도도 해본다.

자아의 집착과 욕망의 중심에서 벗어나려 할 때 우리의 어둠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지없이 쉬운 일인 듯 보이면서도 때론 끝내 다 풀어내지 못하는 삶의 숙제처럼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바라봐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일 수가 있다. 그런고로 자신을 철두철미하게 대면하고 있으면 어둠속에서 떠오르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서서 하늘을 쳐다본다. 먹구름 낀 흐린 하늘에 곧 비가 올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비록 비극적인 짧은 생을 살았을지라도, 오히려 불멸의 시를 남겨 푸쉬킨의 생은 아주 긴 삶이 아니었던가를 생각하면서 아득하게 푸쉬킨의 속삭임을 귀담아 듣고 싶다.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 즐거운 날은 오고 말리니.” 오롯이 우리를 위해서 이 시가 탄생한 것 같다. 따라서 이 시구들처럼 앞날을 믿고 우리 모두는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보자. 그리고 흐린 하늘처럼 우리의 삶이 아무리 아득해 보일지라도 견디며 살아보자. 살다 보면 삶의 어깨너머로 우리의 어둠을 밝혀주는 빛들로 피어날 즐거운 날들이 오고야 말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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