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에] 김영애 수필가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하는 현실 속에서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이 많아졌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기 전에는 열심히 일을 하면서 또한 적극적으로 나름 문화생활을 누리고 살았었다. 영화를 보고 음악회도 가면서 때로는 서울에서 공연하는 뮤지컬이나 오페라 공연도 다니는 호사를 누렸었다. 엉킨 실타래처럼 업무가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훌쩍 나가서 미술관 나들이를 하고 오면 생각에 코가 꿰어지고는 했었다.

나의 숨통이었던 문화 공간들이 굳게 문을 닫은 지도 오래되었다. 기약도 없는 이 암울한 시기를 어떻게 슬기롭게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해야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FM 음악 방송에 채널을 고정하고 다양한 음악에 푹 빠져서 지낸다.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진 요즘은 모든 음악들이 마음에 깊이 와 닿는다. TV를 시청하면 눈과 귀가 TV 앞에서 꼼짝도 못하지만 라디오를 켜 놓고 음악을 들으면 책을 볼 수도 있고 다른 업무도 효율적으로 할 수가 있어서 일거양득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볼거리가 필요했다. 동네 도서관을 자주 드나들게 게 되었다. 유독 미술에 관련된 책들을 관심 있게 보게 되었다. 얼마 전에 모네와 르느와르 명화 레플리카 전시회가 있어서 주말에 가려고 계획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 위험이 격상되면서 아쉽게 관람을 하지 못했다. 유럽의 박물관에서 가져온 원작은 아니더라도 꼭 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남았었다. 레플리카란 원작을 실물에 가깝게 복제한 작품을 말한다. 컴퓨터 기술이 고도로 발달해서 원작에 가까운 느낌을 받기도 한다.

경영학을 전공한 어떤 남자가 그림을 좋아해서 세계의 유명한 미술관을 여행하며 느낀 감회를 책으로 만들었다. ‘방구석 미술관’ 이라는 그 책을 읽으면서 나도 덕분에 미술관도 여행하고 좋은 명화도 감상할 수가 있었다. 화가들의 일생과 그의 작품들을 쉽게 설명해주는 책의 내용은 나를 미술의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귀로는 음악을 들으면서 눈으로는 화가들의 정신세계와 그림을 감상 할 수 있는 시간은 행복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한 미술관은 시골 동네의 이발소였다. 이발소에 걸려있던 밀레의 ‘만종’은 어린 나를 왼지 엄숙하게 했었다.

해질 무렵 일을 마친 두 사람이 기도를 드리고 서있다. 그 그림이 밀레의 ‘만종’ 이란 것도 물론 성인이 되어서야 알았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과 ‘오늘도 무사히’ 라는 글과 함께 사무엘의 ‘기도 하는 소년’의 그림이 있었던 걸로 보아서 이발소 아저씨가 교회를 다니셨던가보다. 한쪽 벽면에는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시에 소를 몰면서 밭을 가는 농부 그림의 액자가 있었다. 문학과 미술의 절묘한 조화의 작품이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그 그림들은 아주 오래 마음속에 각인이 되어있었다.

그때 그 이발소에 ‘별이 빛나는 밤’이나 ‘수련이 핀 연못’이 걸려 있었다면 나는 좀 더 일찍 고흐와 모네를 만날 수 있었을 거였다. 지금 내가 단골로 다니는 미용실에 유명 여자 연예인의 화보가 아닌 명화 몇 점 걸려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나는 요즘 방구석에서 명화를 감상중인 호사를 누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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