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아침에] 박기태 건양대 교수 

올해 추석은 어눌한 시대상황의 아쉬움으로 계절의 풍요로움과 여유도 잊은 채 설렘의 흔적조차 없이 고요 속에 묻혀버렸다. 그런 까닭에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연중행사처럼 들뜬 마음으로 고향을 찾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더욱 아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여름의 뜨거움이 불타던 자리, 그 자리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어김없이 가을은 찾아왔고 계절이 선사하는 높고 푸른 하늘과 그 속에서 느끼는 자유로움 그리고 상큼한 향기는 우리의 코끝을 간지럽힌다. 그래서 마냥 어디론가 정처 없이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 가을 나는 ‘안녕’이란 이별의 인사 없이 떠나고 싶다. 어느 누구든 홀연 듯 자유롭게 떠나도 좋은 계절인 것 같아서, 떠나면서 그 떠남을 화려하게 수놓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서 떠난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살짝 떠나야겠다. 그리고 이름 모를 산동네에서 바스락 거리는 낙엽의 속삭임에 맞춰 시를 읊으면서 옛사랑의 추억도 떠올리며 새소리에 잠도 청하고 싶다.

미당 서정주 선생님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했다. 밝음 속에서는 어두운 면을 생각하게 만드는 심리현상이 발동하여 외로움이나 혹은 슬픔의 감정이 고조된다고 누군가가 말했듯이, 날이 흐려지고 비가 내린 후 흐릿한 너머의 모든 것들이 더욱더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맑은 날, 주변을 회상함으로써 자신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형상화된다면 비로소 모든 것들과 자신을 그리고 타인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내면에 숨어있던 자아를 찾을 것 같아서 내가 좋아하는 시 구절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베르 까뮈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 아닌 죽음의 고통 속에서조차도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문득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 하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었다면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우리의 그리움 속에 남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생각이 진하게 파고든다.

우리는 견딜 수 없는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고파 사랑을 하려는 것은 아닌지, 행여 자신의 목마름 때문에 너무 쉽게 사랑을 시작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추해 보자. 위선적인 사랑이 만연해 있는 이 시대에 조금은 치부를 드러내고 조금은 부끄러움을 표현하는 것도 오히려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아마도 미당 선생님은 이러한 이유로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하늘이 푸르고 맑게 개인 날은 모든 것이 분명해짐으로 인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추상의 시간이 틀림없음을 말하고 싶다.

사랑이란 이루었을 때보다 이루지 못했을 때가 안타까운 것임을 말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고상한 말들로 표현할지라도 오롯이 이별을 뒤에 남겨놓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운이나 여백이란 단어로 마음에 각인하기도 한다. 그 여백에서 우리는 쓰라리고 아픈 기억은 가급적 잊으려하고 아름다운 것만 추억이란 미명으로 남기려 한다.

사람을 그리워하든 안하든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 의미가 있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 언저리의 모습을 까뮈는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라고 읊조렸다. 아쉬움으로 책갈피 속에 고이 묻어두었던 단풍잎 하나 꺼내어 지나간 일들을 그려봄으로써 봄날의 어리석음이 가을날의 성숙함으로 승화되어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 같아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올해도 가을은 망설임 없이 찬란하기만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못 다한 사랑이 서러워서 저마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가을에 인사 없이 떠나고 싶은 것이다. 떠난다는 자체가 이미 성숙된 나 자신에게로의 귀환일 수 있기에 누구에게도 인사 없이 떠나야겠다. 그리고 그 시간을, 그 시간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루지 못한 옛사랑의 기억으로 흠뻑 취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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