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아침에] 박기태 건양대 교수 

들판에는 풀들이 황금빛 머리를 일렁이고 있다. 수많은 기억들이 아롱진 봄여름의 들판을 지나 무성한 열정들로 여물고, 한 여름 온몸으로 몸부림치며 세월 모르고 커져만 있던 나의 오만함은 어느새 작아져 사색의 길로 접어든다.

이 가을에 나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내가 한참을 잠 못 이루고 방황해야 하는 하늘의 별자리는 어디인가. 한없이 높고 높은 공간에서 버려진 한 점의 먼지처럼 느껴지는 착각 속에서 이 가을은 나에게 왔다. 삶의 틀에서 이탈하려는 나에게 고독하게 홀로 불 밝혀 밤샘하는 외딴 섬의 등댓불처럼 이 가을은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나 허상에 속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진실한 삶. 그러한 삶을 살다 간 사람들이 세상에는 몇이나 될까! 못나고 어리석고 이름도 없으며 빛나지 않아도 그 속에는 치열한 삶의 내면적 정신이 있고 의지가 있는 그러한 삶을 살고 싶다.

흔히들 자기 자신의 내면과의 싸움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만이 승자가 된다고 말을 한다. 지금 당장은 어느 누가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한 평생 몸 바쳐서 혼신의 힘으로 그 무엇인가를 남기려고 애쓰는 사람, 비록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희미한 먼지처럼 여겨지는 피조물일지라도 그 사람이야말로 삶의 창조자이고 세상을 환하게 밝힐 줄 아는 지혜의 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어쩌면 가을은 영혼을 앓는 사람들의 몫인 것 같다. 하지만 아침에 깨어나 하루의 일과만을 걱정하며 모든 것을 빼앗기는 사람들에게는 가을은 아주 먼 이웃일 수가 있다. 멀리 떨어져서 무심코 지나가는 타인들처럼 그들은 가을과 엇비껴 지나갈 것이다.

몇 년 전 잠시 만났다가 그저 그렇게 헤어진 한 사내가 있었다. 자기밖에 모르는 그의 직장 내 생활은 항상 불만으로 만연돼 있었다. 존재가치는 동료들로부터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는 느낌마저 들었던 그는 여가는 물론 술도 못 마시고 돈에 인색했으며 외톨이 같은 생활을 즐겼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안위나 물질에 관련된 것이었고 타인들과의 만남은 이해 타산적이었다. 그런 까닭에 동료들과의 어울림이란 언제나 귀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 무기력증에 빠지기 일쑤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돌이켜 보건대, 그의 가슴속엔 고독이란 바람은 분명 불지 않을 것 같다. 또한 자기 혼자서 낙엽처럼 고독의 바람을 타고 날릴 줄도 모를 것이다. 싸아한 바람에 고독을 날리는 재미와 영혼의 옷깃을 깊이 꼭꼭 여미어 알싸한 바람을 즐기는 재미는 비록 우리의 피와 살을 마르게 할지언정 정신만은 맑게 하고 살찌게 만들 것인데…….

가을하늘 먼지처럼 떠도는 지독한 외로움을 예리한 칼끝처럼 찔러 일깨우는 영혼,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조화 속에서 나만의 슬픔과 고통의 색감을 느끼며 나만의 생동감이 넘치는 그림을 마음속에 각인하고 싶다. 늦가을 비 내리는 밤 고독한 나를 고독하지 않게, 슬픔을 슬픔이지 않게, 절망을 절망이지 않게 해 줄 내 가슴에 묻어 둔 이름 하나 위하여 옷깃을 여미고 싶다. 그리고 뭉클했던 꿈의 얼굴, 그 얼굴이 영혼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도록 한 생애에 있어 어떻게 살고 어떻게 가야할 것인가를 간절하게 전해주며 연약한 인간성을 핑계 삼아 드러내 보이는 기만함을 가장 싫어했던 시인 김수영과 그의 시 ‘풀’을 되새기며 오늘 밤은 사색에 흠뻑 빠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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