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정혜련 사회복지사

우리 국민이면 고구려 벽화에서 두 사람이 맞붙어 씨름하는 그림을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듬직해 보이는 두 사람이 서로 허리춤을 붙잡고 있는 모습은 현재의 씨름하고 너무 닮아 놀랍다. 이 유명한 장면은 4~5세기경으로 추측되는 고구려 고분인 각저총(角抵塚) 주실(主室) 석벽에서 발견되었다. 고려사에서 충혜왕 때 왕이 씨름을 시키고 구경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문헌에서 나타난 씨름에 대한 최초 기록이다.

조선시대로 건너가면 김홍도(金弘道)의 씨름그림을 볼 수 있는데 단옷날 씨름경기가 벌어지고 갓 쓴 양반부터 상투 튼 서민들과 댕기머리 젊은이들까지 모두 모여 즐겁게 구경하고 있다. 양반과 평민들이 신분제의 벽도 넘어 관람하고 있고 각 인물의 표정에서 흥겨운 경기장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조선후기의 완화된 신분제도를 감안한다 해도 씨름이 온 백성들이 즐기는 대중 스포츠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12년 10월 유각권구락부(柔角拳俱樂部)가 주관하여 극장 단성사(團成社)에서 열렸던 씨름대회의 시초가 되었다. 서울의 고등보통학교에서 체육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강낙원(姜樂袁)·서상천(徐相天)·한진희(韓軫熙)·강진구(姜瑨求) 등이 중심이 되어 씨름의 근대화 작업이 시작되었고 제자들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씨름의 실태를 조사, 파악하는 한편 ‘조선씨름협회’를 결성하고 여운형(呂運亨)을 초대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민족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몽양 선생은 광복 후 조선체육회 초대회장과 조선올림픽위원회 초대위원장이기도 하다.

조선씨름협회에서는 창립기념의 첫 사업으로 1927년 9월,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제1회 전 조선씨름대회를 열었고 전국규모의 현대경기의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광복이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던 조선체육회가 대한체육회로 새 출발하였고 조선씨름협회는 1946년 3월 7일 대한체육회 산하 경기단체로서 15번째로 정식 가맹하였으며, 1947년에 ‘대한씨름협회’로 명칭을 바꾸고 협회규약 및 경기심판규정을 만들어 운영을 강화하였다.

현재는 프로씨름이 많이 후퇴했지만, 80년대는 그야말로 씨름의 황금기였다. 1983년 4월 13일부터 4월 17일까지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에서 천하장사인 이만기라는 엄청난 스타가 그 중흥기를 이끌었다. 당시 씨름의 인기는 9시 뉴스시간이 조정될 정도였다.

모래판에서 펼쳐지는 씨름의 승부는 거의 3초에서 5초 이내에 결정되는데 덩치와 상관없이 손기술, 발기술, 허리기술을 섞어가며 상대방을 눕히며 드라마를 쓴다. 현재 총 18개의 씨름단이 있고 우리 지역의 증평군청인삼씨름단이 올해 11월1일~2일 제57회 대통령기 전국장사씨름대회에 출전하여 단체전 우승을 했다고 한다. 오랜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했던 우리 민족의 씨름이 예전의 명성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에 찾아본 소식에 참으로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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