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사색] 정우천 입시학원장

윤리로 포장하고 도덕으로 무장해도 인간 본성 깊숙한 곳에는 불편한 다른 면이 있는 것 같다. 주변 사람의 좋은 일에 당연히 축하하고 같이 기뻐해야 마땅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생각이 들고 표면적인 축하와는 달리 진심으로 축하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또한 다른 이의 불행에 안됐다는 마음과 동시에 묘한 안도와 쾌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괴감을 느낀 경험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은 선한 의지로 살아가는데 나만 이렇게 못나게 질투하며 사악한 감정으로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 또한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건 자신이 특별히 악하거나 이기심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다. 인간의 본능에 그런 면이 있으며 그런 인간의 성향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감정이다.

독일어에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말이 있다. Schaden(고통)과 Freude(기쁨)의 합성어로 남의 고통을 보면서 느끼는 사악한 기쁨을 말한다. 우리말의 ‘쌤통’이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다. 아마 인간의 보편적 정서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에나 비슷한 말이 있고,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것일 거다. 중국의 ‘행재낙화’(幸災樂禍)나 프랑스의 주아말린(joie maligne)도 같은 말이다. 러시아 민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우유를 많이 생산하는 젖소 덕분에 부자가 된 농부를 부러워하던 옆집 농부가 있었다. 간절한 기도로 기회를 얻은 농부에게 신은 “네게도 옆집 농부처럼 우유를 많이 생산하는 젖소를 주면 되겠냐.”고 물었다. 농부의 대답은 의외로 “옆집의 젖소를 죽여달라.”는 것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시기심이 무심결에 튀어나오고 만 것이다. 차라리 같이 불행해지는 게 마음 편하다는 심리일 수도 있고,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 라는 심정일 수도 있겠다.

타인이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며 담담히 축하하지만 내심으로 질투한다든가,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은근히 즐기는 이런 속성은 세계가 공통인 것 같다. 성공한 이에 대한 질투가 보편적 인간의 감정이라면, 실패하고 망가진 이에게 동질감을 느껴 약자를 응원하는 언더독(underdog) 현상도 비슷한 감정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자기계발서나 도덕 교과서처럼 모두가 이기고 함께 행복해지는 게 가능하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그러나 그건 동화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현실 세계의 삶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그렇게 사악한 감정이 있다고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사는 게 아름다운 세상은 아닐 것이다.

옷 입는 게 불편하다고 발가벗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살아간다. 그건 거짓이나 위선이 아닌 예의이고 공동체를 이뤄나가는 기본이다. 이렇게 불편을 감수하며 숨기고 포장하는 걸 우리는 사회성이라고 한다. 질투의 감정이 본능이라면 그것을 짐짓 감추고 살아가는 의연한 모습은 사회성이다. 그래서 사회는 그럴듯한 외관을 하고 굴러간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