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연일 텔레비전에서는 대중가요가 지배를 한다. 특히 트로트가 급부상을 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여행은 물론, 일상적인 활동이 제한된 것이 어느새 1년이 다 되어간다. 발이 묶이다 보니 눈과 귀가 텔레비전으로 쏠림 현상이 일어났다. 때마침 한 방송사에서 트로트 가수 경연대회가 벌어졌다. 상금 1억 원과 상당한 부상이 내걸렸다.

남편이 먼저 보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정보를 박사처럼 펼쳐 놓는다. 나는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다. 잘 못 부르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보는 것도 스스로 부르는 것도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특히 트로트라는 장르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어느 날 우연히 남성들의 트로트 경연을 보게 되었다. 준결승이 벌어지고 있었다. 혼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당연히 노래에도 빨려들었다. 재방송을 보고 또 보았다. 노래가 이렇게 사람 마음을 잡을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낀다.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우울한 시기에 토로트 노래는 많은 이들에게 위안이 되고 힐링이 되었다. 노래가 그 어떤 말보다, 어떤 행동보다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까마득한 옛날, 우리가 일본에 주권을 빼앗겼을 때 독립운동을 노래를 통해 일깨운 여성이 있었다. 충북의 여성독립운동가 윤희순 여사다. <안사람의 의병가> <병정의 노래> <의병 군가>등 의병가를 직접 지어 보급했다. 노래로 의병 활동을 확산해 가도록 한 것이다. 그 당시 여성들은 학문의 기회도 쉽지 않았을 터인데 직접 의병의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할 생각을 어찌하였을까.

윤희순, 그녀는 1860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열여섯의 나이로 유제원과 결혼을 했다. 국가보훈처 기록에 의하면, 본적은 충주시 엄정면 신만리로 되어 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시아버지 유홍석은 유인석, 유중악 등과 같이 춘천, 가평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윤희순은 의병가를 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부르게 했다. 노래를 통해 의병 활동을 독려하며 사기를 높인 셈이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군자금을 모금하여 구리 놋쇠를 구입, 무기 탄환을 제조하여 보급했다. 한편, 마을 아녀자들과 독립군들의 식사 빨래 등 뒷바라지에 앞장섰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같이 활동한 독립운동의 동지이자 시아버지인 유홍석 1913년, 남편 유제원이 1915년 연이어 사망하자 ‘대한독립단’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독립운동 활동을 전개했다. 의병 활동 중 윤희순만이 할 수 있어던 유일한 부분은 의병가를 지어 부르게 하는 일이었다. <안사람 의병가> 등 8편의 의병가와 <왜놈 대장 보거라> <오랑캐들에게 경고한다> 등 4편의 경고문을 지었다.

1935년 아들 유돈상 마저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하고 10여 일 뒤 그녀 역시 향년 76세를 일기로 만주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아버지, 남편, 아들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나라에 목숨을 바쳤다. 그의 뜻을 받들어 1982년 강원도 항골마을에 ‘해주윤씨의적비’를 세웠고, 1983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녀의 의병가사집은 낱장의 친필 가사들을 절첩한 순 한글 독립운동가의 문집으로 1897년 제작되었다. 문화재청은 등록번호 제750호로 등록, 현재 강원대학교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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