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사색] 정우천 입시학원장     

한 장밖에 남지 않은 달력이 위태롭게 걸려있다. 의지할 곳 없이 홀로 남아 흔들리는 그 얄팍한 두께가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마저 얼마 후엔 영원 속으로 사라진다니 허망함을 더한다.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세월이 저지른 조화에 깜짝 놀라 세월과 시간의 가혹함을 실감하게 되는 계절이다. 

우리는 두 개의 상자를 가지고 있다. 앞에는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자가 있고, 뒤에는 안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상자가 놓여있다. 앞에 있는 어두운 상자에 담긴 시간을 하나 꺼내 뒤에 있는 투명한 상자로 옮겨 담는다. 쉬지 않고 이 상자에서 저 상자로 시간을 옮긴다. 암흑의 상자 속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있는지 모르겠으나 투명한 상자에는 이제 꽤 많은 시간이 수북이 쌓여있다. 깨끗하고 모양 좋게 보낸 시간도 있고 때 묻고 일그러진 시간도 있다. 우리의 삶이 진행되는 모양이 이와 같지 않은가. 미래라는 알 수 없는 암흑의 상자에서 꺼낸 시간을 과거라는 확인 가능한 상자에 던져 넣는 현재라는 행위의 형태로 말이다. 과거로 보낸 시간은 명확히 확인되지만, 미래에 담겨있는 시간은 어떤 것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오늘 꺼낸 시간이 미래라는 상자에 담긴  마지막 시간일 수도 있다. 

미래는 어떤 형태로 얼마나 내게 올지 알 수 없지만, 과거로 지나가 버린 시간은 훤히 그 모습을 내보인다. 혹시 다르게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를 남기기도 하지만, 지나쳐 살아온 여러 모습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거의 다 가버린 올해만 해도 그렇다. 바이러스의 위협에 갈팡질팡하며 비대면이 일상화됐고, 양말처럼 마스크를 바꿔 쓰며 겨우 견뎌온 날들이 이제는 분명히 보인다. 그토록 인류가 자랑하던 문명도 별 해결책을 내지 못한 채 한 해가 저문다. 년 초만 해도 이런 모습으로 연말이 오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심리학의 '사후확증편향'이라는 말처럼, 지나고 나서는 그럴 줄 알았다고 쉽게 말하지만 사실 앞날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마치 과일을 보고 그 속에 씨가 있다는 것은 쉽게 생각하지만, 씨를 보고 다 큰 과일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4세기의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인간에게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세 가지 현재만이 있다고 말했다. '지나간 것들의 현재인 기억, 지금 것들의 현재인 시야, 다가올 것들의 현재인 기대'라는 세 가지 현재로 규정하며, 얽히고설킨 시간의 수수께끼를 모르겠다고 말한다. 시간에는 인간의 지혜로 규정할 수 없는 오묘함이 있다. 지나버린 과거는 모두 알고 있지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가올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행위로 미래가 달라진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과거가 늘고 미래가 준다는 것이며, 기억은 많아지고 희망은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그리는 것이 꿈이며, 꿈은 다가올 시간에 대해 그리는 지도다. 어떤 지도를 가지고 새해를 맞이할 것인가는 각자가 선택해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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