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신축년 새해가 밝았다. 해맞이로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침울하다. 코로나19와 전쟁을 치르기 시작한 지 꼬박 1년이 지나고 있지만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새 달력을 내걸고 천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농다리로 걸음했다. 여기도 발길이 뚝 끊겼다.

혼자 천변을 천천히 걸으면서 21세기 전 세계를 휩쓴 현대전을 생각해 본다. 지난해 느닷없이 닥친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일상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삶의 양식이 달라져 가고 있다.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자꾸 집안에 주저앉힌다. 이웃간 사이를 갈라놓는다. 바이러스와는 대화나 타협이 없다. 사람들 스스로 자제하며 국가 방역 지침에 따라 장기전에 대비해야 할 상황이다. 듣도 보도 못한 난전이다.

세금천 가장자리 얼음장 밑으로 물결이 곰살곰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얼음이 얼지 않은 한 가운데 물결은 도도하다. 그 위로 유유히 흐름을 타는 물새 떼의 유영이 애잔해 보인다. 모진 겨울을 살아내기 위해 물 밑으로 수천수만의 발놀림을 지속해야만 하는 그들의 삶을 알기 때문이다. 어디 그들 뿐이랴. 우리가 견뎌온 역사도 그러했으리라. 암울하던 일제강점기, 선대들이 걸어온 발자국을 되짚고 있는 중이다.

충북의 여성독립운동가 이야기를 쓰면서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재 상해 직원일동 촬영, 대한민국 원년 10월 11일’이란 글자가 한자로 또렷이 새겨진 사진이다. 모두 32명이다. 그중에서 2명의 여성이 눈에 띈다. 이화숙과 김원경이다.

이화숙(1893~1978)은 서울에서 태어나 충북 옥산 출생의 정양필과 혼인하면서 충북의 여성독립운동가로 꼽히고 있다. 어릴 때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미국인 선교사에게 맡겨지면서 근대 신학문과 선진의식에 눈을 뜨게 된다. 우리의 주권이 일본에 침탈당하던 그해 이화학당 대학과에 입학하여 1914년 제1회 졸업생이 된다. 그의 의식은 곧바로 나라의 독립을 위한 길로 뛰어든다.

1919년 항일애국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 상하이 총회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임시정부 국무원 참사로 임명된다. 남자와 동등한 자격으로 임시정부선언서 및 공약 3장 발표 시 당당히 민족대표 32명의 명단에 이름이 오를 만큼 진취적인 의식을 가진 여성이다. 1920년 대한적십자회의 간호원 양성과정을 통한 간호사로 독립군 부상자 치료는 물론, 간호원 양성과 각 분야에서 독립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그해 파리강화회의 참여하기 위해 뉴옥에 머무는 중에 정양필을 만난다.

정양필(1894~1974)은 북미 대한인국민회 디트로이트지방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수차례 독립자금을 출연하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한 인물로, 우리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정순만의 아들이다. 정순만(1876~1911)은 을사늑약 반대 투쟁을 하다 낙향하여 덕신학교를 설립하고 곧바로 망명하여 용정에 이상설의 서전서숙 설립에 참여하여 독립군 양성 교육에 힘을 쏟는다. 박용만, 이승만과 함께 독립운동 3만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화숙은 독립운동가 집안의 며느리로서, 아내로서의 위치를 뛰어넘어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서 미주지역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다. 남편 정양필과 함께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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