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보며] 안용주 선문대 교수 

'광장'이란 말은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넓은 빈터"라는 의미지만, "여러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만나거나 모일 수 있는 자리"를 가리켜 쓰기도 한다. 한국의 학생 민주주의 운동이 태동되었다고 일컬어지는 S대학의 아크로폴리스(Acropolis)광장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같이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은 아니지만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민주주의 깃발을 꽂은 것을 기리는 마음에서 이름을 붙였을 것으로 보인다. 광장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고라( Agora)는 세상을 내려다 보는 높은 위치에 있지 않고 도시에 만들어진 넓은 빈터로 도시의 운동, 예술, 영혼, 정치적 삶에 대해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을 벌이던 장소로 사용되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광장이 존재한다. 붉은광장(Красная площадь 크라스나야 플로샤디)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7만3천㎡(약2만2천평), 텐안먼광장(天安門)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44만㎡(약13만4천평), 이맘 호메이니광장(میدان نقش جهان)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8만4천㎡(약2만5천평)를 자랑한다. 세상을 바꾼 무수한 몸부림이 광장을 통해 발현되었다. 재스민 혁명이라 알려진 튀지니혁명, 홍콩의 우산혁명 등 목소리를 내고 싶은 시민이 한 사람, 두 사람, 광장으로 빈터로 모여들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세상을 바꾸는 물결이 되었다.

일본의 마당을 떠올려 보면 산이 있고, 연못이 있고, 숲이 있고, 돌이 있고 오밀조밀 세상을 축소해서 마당으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나'는 있지만 '너'는 보이지 않는다. 시선은 모두 나를 중심으로 둘러쌓여 있다. '너'가 와서 머무를 곳도, '너'라는 의식도 없이 오직 '자신'의 시선만을 고려해서 만든 것이 일본정원이다.

중국정원은 거대하고 화려하게 자연을 수놓고 있지만 이 또한 사람이 편히 숨쉴 곳이 없다. 위계와 질서, 조화를 중시하다보니 높은 벼슬아치가 볼 수 있는 곳에는 일반 서민은 접근할 수 없는 방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원에서 조차 신분상의 벽을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한국의 정원은 '나'와 '너'가 공존한다. 정원의 구조물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인 비움의 공간 즉 '빈터'인 셈이다.

이 공간은 누구나 채울 수 있고, 누구에게나 허락된 공간이다. 마당 한 켠에 대추나무 한그루, 오동나무 한그루, 감나무 한그루. 생일이면 마을이 모이고, 추수철에는 함께 모여 벼와 깨를 터는 일터가 되고, 팔월 대보름이면 손에 손잡고 강강수월래가 한창이다.

마당 한 가운데 툇마루를 놓고 모깃불을 태우면 3대가 모여 옥수수와 찐감자를 먹으며 밤하늘에 떠 있는 조상별을 찾으며 세대를 가로지르는 의식을 공유한다.

민주주의의 후발국가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세상에 알린 촛불혁명은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광장에서 시작되었다. 3만4천6백㎡(약1만5백평)의 빈터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무엇을 어떻게 채울지는 우리 각자의 몫이다. 최인훈의 중편소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은 마지막 자유의 공간으로 '푸른광장'을 선택한다. 광장이 주는 울림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공명가능한 울림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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