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단상]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고대 수메르 신화에 보면 ‘두무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태양신 우투는 동생 인안나에게 목자 두무지와 결혼하라고 권유를 한다. 그런데 인안나는 이미 농부인 엔킴두와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결국 두무지는 인안나와 결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농부인 엔킴두와 비교하여 얼마나 더 우월한지 강조한다. 이에 질세라 엔킴두 역시 인안나의 선택을 받기 위해 두무지와 치열한 공방을 벌인다.

그 이후의 자세한 과정은 우리가 다 알 수 없지만 다른 토판들에서 두무지와 인난나가 같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결국에 두무지는 엔킴두를 이기고 인안나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한 듯 하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가인과 아벨에 관한 것이다. 가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목자였다. 어느 날 둘이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하나님은 아벨의 것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신다.

이에 화가 난 가인은 동생 아벨을 들로 불러서는 거기서 죽인다. 농부가 목자를 죽인 것이다.

수메르의 두무지 이야기나 성경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아마도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있었던 농경 사회와 목축 기반의 유목민 세력 간의 충돌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수메르 신화에서는 목자가 승리를 거두지만 성경에서는 농부가 승리한다. 왜 그런가? 수메르 신화가 기록된 시기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최소 기원전 2500년경 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성경의 기록은 빨라야 기원전 1000년을 넘을 수 없다.

즉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은 점점 농경 사회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세상의 중심에는 목자가 아닌 농부가 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과 사람들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1-12)

물론 때로는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농부의 모습을 비유로 여러 이야기를 가르치기도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에는 ‘농부’라는 말 보다는 ‘목자’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 듯 보인다.

이는 예수가 생각할 때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농부보다는 목자와 양의 관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왜 목자와 양인가? 이 둘은 서로에 대한 철저한 신뢰 관계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양을 신뢰하지 못하는 목자는 양이 위험에 처한 순간 그 양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 위험에 처한 양은 자신이 소유한 수많은 양들 중 한 마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을 신뢰하는 참된 목자라면 그 한 마리조차 그냥 포기할 수는 없다. 다른 양들을 들판에 두고서라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 15:4)

결국 예수가 생각한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의 참된 관계의 핵심은 바로 서로에 대한 ‘신뢰’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세리’나 ‘죄인’ 혹은 ‘창녀’와 같은 부류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리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예수에게 있어서 중요했던 것은 상대가 무엇을 가졌는지 보다는 서로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는지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관계에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보다는 상대가 나에게 줄 유익이 무엇인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참된 관계의 형성이야 말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유익인 것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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