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장쾌한 산과 맑은 계곡물이 어우러져 청량한 곳, 영동의 어류산 기를 받고 태어나 식민지 차별에 맞선 여성이 있다. 박재복 독립운동가(1918~1998)이다. 심천면에서 가난한 농가의 딸로 태어나 산업 현장에서 은밀하게 항일의식을 확산시켜 나간 여인이다.

넉넉하지 못한 가세로 보통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군시제사주식회사(郡是製絲株式會社) 대전공장 직공으로 또 상점 점원으로 일찍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사회의 흐름에 눈을 뜬다. 열여섯 살, 앳된 나이에 시작된 그녀의 직장생활은 단순히 호구지책으로만 작용한 건 아니었나 보다. 무엇이 그를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했을까.

그녀가 근무하던 군시제사 대전공장은 1930년대 파업 등 당시 폭발하기 시작한 노동운동의 대표적인 곳이다. 청주 군시제사공장 300명 동맹파업과 함께 전국적으로 관심을 받던, 일제 수탈의 현장의 본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청주공장은 후에 남한제사주식회사를 거처 대농으로 이어지며 청주를 방직산업의 메카가 되는데 한몫했다.

박재복이 일제강점기 일본의 수탈을 몸으로 느끼며 나라 없는 비애로부터 탈피를 꿈꾸게 된 것은 아마도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식민지 국민으로서 차별받는 현실을 체험했기 때문이리라. 비록 힘은 없어도 분연히 맞설 담대함을 가졌던 것은 남다른 역사의식이 내적으로 깊게 자리하지 않았나 싶다. 

그는 1934년부터 1938년까지 근무하는 동안 동료 직원들에게 수시로 "중일전쟁에서 일본은 반드시 패망할 것이다"는 말로 항일의식을 전파 시킨다. 일본이 중국과 장기전에 돌입할 경우 물자 부족 등 패전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들어 기숙사를 중심으로 은밀하게 주장하며 일본의 패망을 주지시키는 일에 앞장선다. 그 일은 회사를 퇴직하고 백화점인 '양만지' 상점 점원으로 근무를 하는 동안에서 여전히 전 회사 동료들과 수 차례 교류하며 지속해 나간다.

그로 인해 1941년 10월 유언비어 유포죄로 체포되어 전주지방법원에서 육군형법 위반형으로 금고 1년을 선고받아 전주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향년 80세에 별세하여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박재복 선생이 태어난 영동군 심천면은 난계 박연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박연은 조선 시대 문인이면서 음악가로, 고구려 왕산악, 신라 우륵과 함께 3대 악성으로 꼽히는 분이 아니던가.

박연 선생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관료로서 업적도 있지만, 작곡과 연주, 악기의 조율, 궁중음악의 이론 정립 등 소리로 세상을 바로 세워가고자 했다. 음악적 감흥이 조용히 스며들어 인간 감정을 순화시켜 본연에 닿게 했다. 박재복 선생은 일제강점기, 빈농의 딸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먹고 살기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여공 생활을 하면서, 은밀하게 항일의식을 전개해 나간 여인이다. 

서로 다른 듯 닮은 삶이다. 2월 계곡의 짱짱한 얼음장 밑으로 맑은 물이 잠잠히 흐르고 있음을 본다. 한 계곡의 물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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