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단상]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2021년도 대학 정시모집인원이 공개되면서 지방대학교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고 하지만 이 정도로 미달 사태가 나올지는 몰랐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의 인구 감소는 전 세계에서도 가장 높은 축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제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시대가 아니라 각 대학들이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처럼 시대의 변화는 문화와 전통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전까지 옳았던 방법도 어느 한 순간에 틀린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안식일 계명을 아주 철저히 지켜왔다. 한 일화에 따르면 그들은 외부에서 적이 침략을 해온 경우에도 그 날이 안식일인 경우에는 맞서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주변의 민족들은 안식일을 이용하여 유다 민족을 공격하는 전법을 사용할 정도였다.

그런데 셀류코스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등장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안티오코스 4세는 자신의 사자를 보내 당시 유대 대제사장이었던 맛다디아로 하여금 자신들이 믿던 그리스 신에게 제사를 드려 유다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맛다디아는 이를 거절하고 왕의 사자는 물론이고 그리스 신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한 유대인들조차 모두 죽이고는 자신의 다섯 아들과 함께 광야로 도망을 쳤다. 그 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으고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한 전쟁을 선포한다.

얼마 후 맛다디아가 죽자 그의 아들 중 마카비가 유대인들을 이끌었다. 마카비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안식일에도 칼을 들고 싸울 것을 외쳤으며 이러한 전략의 변화로 인해 마카비의 군대는 잠시나마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유다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안식일 계명에 대한 논쟁은 성경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하루는 예수가 회당에 있을 때 그 중에 손 마른 사람이 함께 있었다. 이에 어떤 이들이 예수를 향해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물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물은 이유는 예수가 안식일 계명을 어기고 이 손 마른 사람을 치료하면 이를 빌미로 예수를 고발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

예수가 생각하는 안식일의 가치는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 거룩하고 복된 날 ‘선을 행하고 있느냐?’ ‘악을 행하고 있느냐?’하는 점에 있었다.

병을 고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은 악이라 볼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선한 일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결코 안식일 계명을 어기는 일이 아니다.

이러한 예수의 해석은 기존의 지식인들에게는 큰 반감을 사게 되었고 가난하고 병든 자에게는 마치 가뭄 후의 단비와 같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그런 말씀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전까지는 들어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는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지켜오던 전통적인 지혜를 넘어서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했다. 이런 예수의 가르침에 익숙하지 않았던 많은 이들이 의문을 품자 그들을 향해 이와 같이 말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7)

시대의 변화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는 인구의 감소나 코로나 19 사태와 같은 상황으로 인해 급변하는 시대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지혜인 것이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듯이 우리 자신이 새로운 시대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길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내 자신이 새로워짐으로써 새로움이 다름이나 틀림이 아니라 변화와 발전, 더 나아가 내일을 위한 새로운 소망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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