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사색] 정우천 입시학원장

마스크 없이 살던 날이 언제인가 싶게 아득하다. 코로나19의 어두운 터널 속에 빠진 지 이제 1년이 지났고, 얼마를 더 지나야 평온한 일상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팬데믹의 어둠에 갇혀 1년을 지내고 보니 어둠에 익숙해진 듯한 느낌도 든다.

영어로 재난(disaster)은 dis(없는)와 astro(별)의 합성어다. 별빛 하나 없이 깜깜한 상태라는 뜻이지만, 빛이 보이면 끝도 보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백신 접종이 시작됐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걸 보면 그 빛이 백신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저 멀리 터널의 끝에 어둠을 밝히는 빛이 보이는 것 같다.

 
인류가 지구의 주인이 된 데는, 협력과 경쟁이라는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 큰 역할을 했다. 인류가 이뤄낸 문명의 근저에는 호모사피엔스의 이러한 성향이 바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성이라는 속성이 만든 도시화라든가 집단의 문화라든가 하는 것은, 코로나 19 같은 전염병의 감염에 매우 취약하며, 조심하고 피해야 하는 인류의 속성이 돼버렸다. 인류의 문명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던 특성과 팬데믹을 막기 위해 피해야 할 행위는 이제 서로 충돌하며 적절한 조율이 필요하게 되었다.
 
코로나 19가 지구촌을 휩쓴 1년간 세상은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공동체를 이루며 서로 모여 삶을 영위하던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생활습관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바뀐 삶의 형태는 당연히 경제적 변화도 불러왔다. 위치와 상황, 그리고 적응한 방향에 따라 어떤 자는 흥하고 어떤 자는 망했다. 누구에게는 기회였고, 다른 이에게는 죽음으로 내몰리는 재앙이었다. 접촉과 만남을 중심으로 했던 산업은 몰락의 길로 갔고 비대면과 가상공간에서 만나 사이버 세상을 만드는 산업은 번창했다.

냉정해 보일지 몰라도 인생은 어차피 각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긴 장례식장의 울음이 있는 동시에, 그 옆에서는 새 출발의 기쁨으로 들뜬 결혼식도 있는 게 세상이다. 팬데믹의 공포와 방역의 방향은 비대면이 일상화되는 세상을 훨씬 앞당겼다. 아날로그적 세상이던 중세엔 창궐하는 페스트를 피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있는 소수끼리 사람 없는 산속의 수도원 등으로 피하는 게 고작이었다. 페스트를 피해 피렌체 교외의 별장으로 피난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데카메론'도 그렇게 탄생했다. 현재의 '프라이빗이코노미'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디지털 세상은 다행히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다.
 
같은 재난을 만나도 굴복해 파멸하는 자와 극복하고 살아남는 자가 있다. 지나친 비관도 문제지만 지나친 낙관도 문제이다. 베트남 전쟁 때 곧 풀려날 거라 낙관만 하다 상심을 못 이기고 죽은 동료들의 틈에서 스톡데일(Stockdal)은 8년의 포로 생활을 견디고 살아서 돌아왔다. 비현실적인 낙관이나 자기기만과는 대비되는 냉철한 현실 인식과 뚜렷한 목표 의지가 동반되는 것을 말하는 '스톡데일 패러독스'라는 현상은 그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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