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익칼럼] 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너 자꾸 그러면 혼난다. / 형(언니)은 안 그런데 너는 왜 그 모양이니? / 엄마 속을 홀딱 뒤집어 놓았잖아 / 한 번만 더 그래봐 … ’ 부모 자식 간 이런 유형의 대화를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어떻게 대꾸해야 할까. 현대사회 목마른 증표로 소통(疏通)을 꼽는다. 최근 웬만한 사람이면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관계 맺기에 바쁘다. 바깥세상과의 갈증일 수 있다. 상대방 급소를 선방한 채 혼자 말하고 자기 방식대로 해석해 버릴 때 ‘소설 쓴다’ 며 비아냥한다. 선택적 소통인 정치권 불통은 가히 깽판 급이다.

대화의 혼란

필자의 경우, 모 방송 프로그램 휴먼다큐 ‘사노라면’ 시청 횟수가 부쩍 늘었다. 보통사람들 일상소재라서 더 끌린다. 객지 삶을 접고 부모와 한 지붕에 든 자식 대부분은 얼마 못가 ‘넌 아직 멀었어, 이걸 농사라고’ ‘제가 알아서 해요, 잔소리 몇 번짼 줄 아세요?’ 가는 말과 오는 말이 엉켜 감정은 뜨악해 진다. 정치다큐는 어떨까. 재·보궐 선거철 넉살좋은 정치꾼들 국민가슴도 꽤나 후볐다. 네거티브로 저질 험한 입담에 이골 났지만 자신의 불통엔 무척 둔감했더랬다. ‘내부 총질, 뒤에서 칼 꽂아’ 듣기 섬찟하다. 국어대사전에도 등재 안 된 ‘아사리판, 꼬붕’등 노련하게 꺾고 젖혀온 여권 야권 중진 입수준이 거기까지다. 수십 길 낭떠러지를 나 몰라라 꼭대기만 탐하는 대화의 혼란이다.

그런가하면 회의 첫 인사도 끝나기 전, 다짜고짜 독설부터 쏟으면 어쩌라고. 4차 국민재난지원금을 놓고 당·정 간 ‘더 풀자'와 '덜 풀자'의 단세포적 논쟁에서 말꼬리를 잘랐다. 조율 안을 거부한 경제부총리를 향해 ‘여기가 기재부 나라냐?’며 총리의 압박 언성이 터졌다니 그렇듯 격앙된 상황에서 무슨 재간으로 재정건전성 우려를 조근 조근 짚을 수 있단 말인가. 최고 소통은 듣기다. 어떤 조직이든 형식상 무늬만 그럴싸한 수평적 대화는 결국 전혀 딴판인 편법·왜곡·변칙 개연성마저 높다는 얘기다.

소통 게임

4.7 재·보궐선거 역시 ‘착각은 자유’ 딱 그거였다. 너무 가벼운 입 탓에 여·야 큰 손해를 봤다. 민의는 뒷전인 채 신들린 헛소문에 욕지거리.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여북하여 구원투수랍시고 등판한 사람까지 말이 뒤엉켜 ‘아 제발 그만 좀’ 경고까지 받았겠는가. ‘역사의 낮은 경험치 어쩌고 저쩌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며 미끼 몇 개 던져 입질을 노렸다. 소통도 품앗이다. 끼리끼리 실컷 불어댄 나팔 소릴 대체 무슨 수로 알아듣고 ‘표’를 달란 것이었는지 도저히 설명 불가다. 선수·감독 뒤범벅되어 마구 후려 댄 헛스윙이 끝났는데 경기장 밖 용병들 또 괴죄죄하게 핑계와 탓을 퍼붓는다. 그러나 내년 3월은 어차피 강속구, 아니면 커브볼로 대선 승부가 난다. 군말 필요 없다. 민심과 간극을 좁힌 ‘소통 게임’ 아닐까.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