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칼럼] 한옥자 수필가

손끝에 전화기를 달고 산 후, 책에서 점점 멀어졌다. 전화기 속에는 읽을거리가 많았다. 검색어 몇 개만 입력하면 글이 수두룩했다. 여기저기 손가락만 대면 포스팅이 대기했고 이래도 되나 싶게 신기하다가 나중에는 중독이 되다시피 했다.

궁금하면 바로 검색하여 알게 되니 금세 잊기도 잘한다. 도서관이나 책방에 가서 책 속에서 찾은 답을 반복해 읽으며 궁금증을 풀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으니 쉽게 배운 지식은 쉽게 잊힌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검색 결과가 모두 맞지는 않는다. 신문 기사가 그렇고, 각종 SNS의 게시글이나 댓글이 그렇고 물건의 사용 후기가 그렇다. 정보 또한, 잘못 게시된 것이 많으며 그중 뭐니 뭐니해도 신문 기사는 곧이곧대로 믿다간 한심해진다.

크로스 체크가 생활화되었다. 비교하지 않았다가는 낭패 보기가 십상이라서 기사가 되었건, 필요한 정보가 되었건, 비교 분석을 한다. 볼거리가 너무나 많아 눈이 피곤하다. 정작 독서하고 싶어도 종일 전화기를 들여다봐서인지 오후가 되면 활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러니 독서의 방해꾼은 단연코 손전화기이다.

큰맘 먹고 신문 기사 몇 개를 훑어봤다. 비틀고 쥐어짠 제목과 리드가 글의 맥을 가로막는다. 한도 끝도 없이 말과 글을 지어내는 한글의 우수성을 이렇게 악용하면 안 되는데 도대체 무슨 음험함을 드러내려고 뱅뱅 돌리는지 두서너 번을 읽어봐도 잘 모르겠다.

거듭 읽다 보니 사실을 어지럽게 만들어 결국은 쓰러뜨리고 낚을 의도가 환히 보인다. 몇 번을 읽어봐도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셔야’ 하는데,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시고’ 마는 격이라 아무 말 잔치의 진수를 본다. 요즘 문해력의 중요성이 새삼 대두되는데 이것은 쉽고 가볍게, 눈짐작으로 대충 글을 읽는 습관이 낳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외눈박이라는 말에 흠뻑 빠진 적이 있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이라는 류시화 씨의 시 한 편 때문이었는데, 시를 중얼거리면서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이라는 대목에서 번번이 사르르 가슴이 녹아내리곤 했다.

희미한 기억을 들추어 보면 아마도 그때 내 처지가 외눈박이 같다고 생각해서였던 것 같다. 눈 하나로 세상을 살기는 얼마나 벅찬가. 둘이 하나 되어 서로의 눈이 되어준다면 내가 보지 못한 그 무엇이 보일 텐데 치우친 눈으로는 중심을 잡기에도 역부족이었으니 온전한 두 눈을 갖게 되길 바라며 시어로 위로받았던 것 같다.

온전히 두 눈을 뜨고 살다가도 때때로 무너진다. 그럴 때 심심풀이로 던진 돌에 맞아 죽은 개구리 심정이 되고 마음의 봐야 하는 눈은 기울고 만다.

한두 사람이 말을 맞추면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일은 잠깐이다. 훤한 백주에도 벌어지는 그런 일을 숱하게 봐왔고 검사가, 정치인이 득세를 위해 잘 써먹는 방법임이 검증되고 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읽어도 알 만한 말을 가지고 장애인을 비하했다고 억지 쓰는 정치인을 본다. 정작 장애인들은 자신들을 정쟁의 도구로 쓰지 말라고 항의하는데 이를 이용하는 자, 누구인가. 그가 진짜로 장애가 있는 마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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